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신보수 선언’이 정치권 안팎에서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지난 8일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균형발전을 추구해 보수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한다”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보수적 가치를 “정의롭고 공정하며, 진실되고 책임지며, 따뜻한 공동체 건설을 위해 땀흘려 노력하는 보수”로 규정했다.
지난 10여년간 원내 교섭단체대표 연설을 100번도 더 넘게 봐온 입장에서 이번 유 원내대표의 연설은 단연 최고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이들을 몰입하게 만들었고, 시종일관 자신의 분명한 생각을 명확하게 담아냈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바에 대해 솔직히 사과하면서 집권여당의 정책방향을 국민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끌어가겠다고, 또 야당의 세금ㆍ복지 대타협기구 설치 제안을 수용하면서 상생의 정치를 다짐했다. 극히 이례적으로 야당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박수를 치며 극찬했을 정도다.
그런데 야당과 언론의 호의적인 반응과 평가 못지않게 네티즌들의 반응은 사뭇 과격하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또 표 달라는 소리구나” “국민이 바보인 줄 아느냐” “두 번 속였으면 됐지 또 속이려는 거냐” “표 얻고 나면 딴소리 할 거 아니냐” “무슨 양치기 소년이냐” 등등. 물론 호의적인 평가도 적지 않지만 이 같은 비판과 우려와 분노가 상당하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잠시 6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2009년 8월 15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분열과 갈등을 뛰어넘어 화합과 통합의 구심력을 만들어내려면 중도실용의 길을 가야 한다…중도는 국가 발전이 국민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위민(爲民)의 국정 철학이다…실용은 중도를 실현하는 방법론으로 국민의 삶과 괴리된 관념과 구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우리는 사회적 약자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따뜻한 자유주의를 추구하겠다.”
집권 첫 해인 2008년 ‘광우병 사태’로 흔들렸던 이 전 대통령은 미소금융을 비롯한 친서민 정책으로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대체했다. 그 결과 한때 10%대까지 추락했던 지지율은 그 해 연말께 40%대를 회복했다. 2010년에는 ‘공정사회’, 2011년에는 ‘공생발전’이 각각 국정의 키워드로 제시됐다. 하지만 이명박정부 5년간 서민들의 삶이 나아졌고 공정사회ㆍ공생발전이 이뤄졌다고 보는 국민이 몇 명이나 될 까.
2012년 7월 10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출마 선언문의 일부다. “경제민주화를 통해 중소기업인을 비롯한 경제적 약자들의 꿈이 다시 샘솟게 하겠다…그간 우리 경제는 효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공정성의 중요성을 간과했고 그 결과 경제주체 간 격차가 확대되고 불균형이 심화돼 왔다.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일은 시대적 과제다…영향력이 큰 기업일수록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과감하고 단호하게 법을 집행하는 정부를 만들겠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까지만 해도 야당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했다.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앞세운 사실상의 보편복지 공약도 넘쳐났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박근혜정부가 경제민주화와 보편복지 관련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여기는 국민은 또 얼마나 될 까.
사실 유 원내대표의 연설 내용은 청와대의 평가대로 평소의 소신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명박ㆍ박근혜 두 전ㆍ현직 대통령이 국민의 눈과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담론을 제시할 때의 ‘변신’과는 출발이 다르다는 얘기다. 많은 국민들이 유 원내대표에게서 ‘이명박ㆍ박근혜 데자뷰’를 떠올린다면 본인은 다소 억울하겠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이다.
유 원내대표는 여권 내부와 보수진영의 비판과 반발을 견뎌내면서 새누리당을 신보수의 길로 끌고 갈 수 있는 실력과 기반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원내대표의 본분을 저버리고 ‘사견’을 얘기한 실없는 정치인이 될 수밖에 없다. 유 원내대표가 국민적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그 과정이 훨씬 수월할 텐데 이 역시 본인 몫이다.
양정대 정치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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