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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함께 즐기는 축제로

입력
2015.04.0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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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기는 일본고교야구 최고의 축전인 고시엔(甲子園)에 비유되는 한국고교야구 최고 대회이지만 일본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한국은 결승전이 아니면 학교 관계자들과 선수 가족들만이 스탠드를 지키지만 일본은 지금도 거의 매 경기 만원 관중이 입장한다.

우리도 일본과 같은 시절이 있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인 1970년대만 해도 고교야구대회가 열리는 날 암표는 기본이었고, 표를 구하기 위한 팬들의 발길이 서울운동장(1985년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 이후 2008년 철거)에서 동대문시장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장사진을 이뤘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그 시절에 기댈 곳은 고향밖에 없었다. 그래서 출신 지역 팀이 출전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야구장으로 달려갔다. 혼자 가기 섭섭하니 동문 선후배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야구장 동문회’를 만들었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 대로 시원한 생맥주 한 잔하며 뒤풀이를 즐겼다.

필자가 고교생이던 70년대 초반만 해도 다들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 대회에 한 번 출전하려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교생이 모금운동을 하거나 동문회에 손을 벌려야 했다. 그래도 그때만 다가오면 만사 제쳐두고 선수, 동문 할 것 없이 자기 일처럼 나섰다. 오직 ‘축제’를 즐길 때가 다가왔다는 설렘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거 고교야구는 단체 응원을 통해 애교심을 고취하고 전 동문이 어우러지는 축제의 장이었다. 봉황대기를 소재로 인기를 모은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을 보면 그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82년(필자는 삼성에 원년 멤버로 입단했다가 83년 해태로 트레이드됐다) 봉황대기에서 재일동포팀이 결승까지 올라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와 치른 혈전은 영화에 나온 것처럼 정말 드라마같은 장면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경북고를 졸업한 74년에도 재일동포팀은 결승에 올라 대구상고에 졌다. 그만큼 봉황대기는 재일동포팀까지 방학을 이용해 유일하게 출전할 수 있는 대회이자 대한민국 국적이라면 누구든 참가할 수 있는 야구 축제였다.

아마추어가 프로의 젖줄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얘기다. 그러면서도 정작 학생 야구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게 현실이다. 야구장 관전은 고사하고 TV 시청도 많지가 않다. 2013년에 부활한 봉황대기가 올해는 4월에 열린다는 소식을 들으니 야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반갑기 그지 없다. 프로야구가 10구단까지 창단된 지금, 고고야구 수(65개)는 너무 적다. 인구 비례를 따져 봐도 그렇고, 상급 무대의 원활한 선수 수급을 위해서는 최소 100개 정도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가 야구팀 창단을 꺼리는 이유가 바로 주말리그 시행으로 인해 봉황대기와 같은 단기전이 사라지거나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2013년 다시 태어난 봉황대기가 올해는 시즌 첫 대회로 문을 연다니 이를 계기로 고교야구에 다시 한 번 1970~80년대의 함성이 울려 퍼지길 기대한다.

서정환 KBO 경기운영위원(전 KIAㆍ삼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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