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불법 부인한 판례 탓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발령한 긴급조치 1호의 최초 위반자로 옥고를 치른 백기완(83) 통일문제연구소장이 국가 배상을 한 푼도 못 받게 됐다. 서울고법 민사33부(부장 이경춘)는 백 소장과 부인 김정숙(82)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2억1,6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뒤집고 원고패소 판결했다고 8일 밝혔다.
재판부는 먼저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령은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일 뿐 국가배상법이 정한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는 아니다”는 대법원의 지난달 판례를 전제로 삼았다. 따라서 “백 소장에 대한 수사와 유죄판결은 긴급조치 1호에 따른 것으로 수사기관과 법관의 직무행위는 불법행위가 아니었다”고 결론지었다. 재판부는 또 “백 소장이 영장 없이 체포ㆍ구금돼 조사 과정에서 구둣발로 짓밟히는 등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을 인정하지만 소송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1975년 이후 30년이 더 지난 2013년 제기돼 손해배상청구권은 그 시효가 소멸됐다”고 덧붙였다.
백 소장은 1974년 개헌청원 서명운동본부 발기인으로 유산반대 운동을 벌이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뒤 기소돼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그는 2013년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자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며, 1심은 “국가기관이 헌법상 의무를 저버리고 오히려 가해자가 돼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백 소장의 손을 들어줬었다.
법원은 이와 달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등에 연루돼 6년여 간 옥살이한 시인 김지하(74)씨의 항소심에서는 15억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서울고법 민사2부(부장 김대웅)는 이날 김씨와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5억원을 배상하라”고 판단한 원심대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김씨 등은 앞서 2013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형사보상금 4억2,800여만원을 받았다.
재판부는 다만, 국가가 ‘오적필화’사건에서 김씨를 반공법 위반죄로 처벌하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만큼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김씨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3년 재심에서도 오적필화 사건은 무죄가 아닌 집행유예 판결이 났고, 수사과정의 가혹행위를 인정할 근거도 없다는 이유다.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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