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은 나로호 발사 전까지만 해도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유자와 한센인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소록도로 좀 알려진 정도였다. 발사에 성공하기까지 5차례에 걸쳐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이후 고흥은 단숨에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우주센터가 자리잡고 있는 나로도(羅老島)는 이름만큼 아름다운 섬이다. 바다를 지나는 배에서 보면 하얀 해안절벽이 비단을 널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나로도라 불렀다. 섬 전체가 나라에서 키우는 말 목장이어서 ‘나라섬’이었다는 설도 있다. 혀에서 도르르 구르는 듯한 ‘나로’라는 소리만으로도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이다.
편백숲의 원형을 보려거든 봉래산으로 가라
나로도는 내나로와 외나로, 2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졌다. 고흥반도에서도 동쪽 끝자락이다. 여의도 약 3.5배 크기의 외나로도는 한때 고흥군 세수의 30%를 충당할 만큼 삼치 파시로 유명했던 곳이다. 외나로도 여행에서 우주과학관을 빼놓을 순 없지만, 그것만 보고 돌아서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외나로도에서 가장 높은 봉래산은 고흥 사람들이 제일로 꼽는 자연경관이다. 영주산, 방장산과 함께 중국 전설상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과 이름이 같다.
봉래산 산행은 봉래면사무소에서 나로 우주센터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부근의 무선국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이곳부터 정상(410m)-시름재-편백나무숲-주차장으로 되돌아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중간에 우주과학관으로 내려가는 길을 빼면 다른 등산로가 없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약 6km 쉬엄쉬엄 3시간이 걸린다. 그리 높지도 않고 겉보기에 밋밋해 보이지만 편백과 삼나무숲을 비롯해 사철 푸른 상록활엽수와 야생화가 바닥을 뒤덮고 있어 심심할 틈 없이 등산의 묘미가 넘친다.
주차장 바로 아래서 길이 갈라진다. 왼편은 편백숲(1.9km), 오른쪽은 정상(2.2km)으로 가는 길이다. 편백숲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순탄하지만, 봉래산을 제대로 즐기려면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를 택해야 한다. 이유는 산등성이에 올라봐야 알 수 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이른 봄이면 노란 복수초가 지천이라는데 지금은 현호색이 파르스름하게 바닥을 뒤덮고 있다. 줄사철과 마삭줄 등 덩굴식물이 소사나무 하얀 줄기를 검푸르게 감싸고 올라 이제 갓 봄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처음 약 600m는 오르막이 계속된다. 가파르진 않아도 등에 땀이 촉촉히 밴다. 소사나무 군락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약 30분을 오르면 드디어 산등성이다.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양쪽으로 계속 바다를 볼 수 있다.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빗대 흔히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고 표현한다. 말 그대로다. 곧장 편백숲으로 갔으면 보지 못했을 풍경, 그 숲을 한눈에 담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다.
수령 100년이 가까운 9,000그루 삼나무와 1만 2,000그루 편백나무 숲이 산중턱에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자연다큐멘터리에서나 가끔 볼 듯한 타이가나 북유럽의 침엽수림을 닮았다. 단 30분 발 품만으로 원뿔 모양의 나무 봉우리가 음영을 이루며 빼곡하게 나열된 모습은 우리나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숲 안내문에는 ‘1920년대 봉래면 예내리 산림계원들이 황폐화된 산림을 아름답고 건강한 숲으로 조성코자’ 정성 들여 심고 가꿨다고만 적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성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피한 것처럼 보인다. 군흥군에서 정한 10경에도 들지 못했으니 관에서도 적극적으로 알리지는 않는 듯하다. 나무가 무슨 죄가 있을까?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 땅에 뿌리내리고 이만한 경치를 이뤘으니 당연히 우리의 자랑이다.
길들이지 않은 원시의 건강함이 깃든 숲길
약 1시간을 걸어 정상에 서면 편백숲 아래로 파란 저수지(예내지)가, 또 그 아래로 우주과학관과 남해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반대편으로는 염포마을과 해수욕장의 모습이 평화롭다. 정상은 편편한 돌무더기로 덮여 있는데, 봉수대가 있던 곳이었다. 우주센터 발사장 바로 뒷산 정상에 훼손이 덜한 봉수대가 하나 더 있는데, 민간의 출입이 통제된 지역이다.
시름재를 거처 돌아오는 길에 위에서 본 편백?삼나무 숲을 통과한다. 입구부터 아름드리 거목에 가려 대낮에도 해가 거의 들지 않는다. 피톤치드 운운하지 않아도 간간이 비치는 햇살 사이로 100년 편백이 내뿜는 건강함이 온몸으로 스미는 듯하다. 우람한 나무기둥 사이를 통과하는 약 500m 외길에 편의 시설이라고는 벤치 몇 개가 전부다. 숲 아래 자라는 다른 나무도 정리하지 않았다. 관목이 자연스럽게 바닥을 덮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다도해 국립공원에 속해 있기 때문에 개발이 제한된 게 주된 이유다. 그래서 인공조림인데도 봉래산 편백숲은 원시의 자연스러움을 풍긴다. 관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래와 위의 굵기 차이가 커서 목재로서의 가치는 떨어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원뿔모양 수형이 도드라져 보인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은 현호색과 별꽃, 노랑 하양 갖가지 제비꽃이 수놓은 평탄한 산책로다. 출발점에 세워 놓은 안내판에 다시 한번 눈길이 간다. ‘오늘 이 길을 걸으면서 세상사 어디선가 받은 상처, 흔적 없이 치유되시길 기대해 본다’ 봉래산 편백숲길은 외나로도까지 긴 여행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이들에게 섬이 주는 선물이다.
고흥=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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