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간암 말기… 6개월 시한부
"암세포가 커 수술 불가능" 판정
4년간 항암치료 견디고 수술 성공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생활화
과수재배 등 100% 정상생활
병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무병장수한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병은 우리 삶의 일부다. 그럼에도 우리는 질병과 환자를 끊임없이 나와 무관한 타자로 배척하고 격리하고 심지어 죄악시하기까지 한다. 특히 난치병 환자들은 일차적으로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 만만찮은 의료비용,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라는 삼중고를 겪어야 한다.
한국일보 대구취재본부는 난치의 질병들을 극복한 의지적 사례들을 모아 ‘2015 희망 릴레이3 - 병마를 이긴 사람들’을 연재한다. 온전한 삶을 포기하거나 아예 삶을 끝내라고 다그치는 극한의 상황에서 ‘삼중고’를 이겨낸 그들의 투지와 결기에 경의를 표하고 지금도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환자들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던지기 위함이다. 희망은 절박한 상황에서 굳세게 돌아온 자의 몫. 우리에게 다함 없는 밑천은 언제나 희망 하나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옛말이 딱 맞아. 병원에선 6개월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는데, 소백산을 매일같이 오르내리면서 한번도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암도 스트레스에서 왔으니 등산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렸고, 자연스레 암도 이기게 된 것이지.” 소백산다람쥐 박재완(58ㆍ경북 봉화군 화천리)씨. 소백산에서 그를 만난 등산객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는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회복하게 된 것을 “걸어야 산다”는 평범한 철학을 실천하며 스트레스를 날려 버렸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가 간암 말기 선고를 받은 것은 2001년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42살밖에 되지 않았다. 영주시내에서 유명 브랜드 의류 대리점을 하다 다른 사업 구상을 위해 촌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던 시기였다. “배가 아파 안동의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라고 했다. 혹시나 하고 서울의 큰 병원에 갔지만 간암 확진 판정이 났다. 암세포 크기가 13㎝나 돼 수술도 어렵다고 했다. 하늘이 노랬다. 간이식도 맞는 간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비용문제도 있어 쉽지 않았다.” 그는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의사는 그에겐 단지 간암이라는 사실만 알렸다. 가족들에게는 6개월을 넘기기 어려우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그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0.1%의 가능성에 도전했다. 수술을 하려면 일단 암세포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했다. 의료진과 박씨가 선택한 치료법이 간암색전술이다. 간암 세포에 가는 영양분을 차단, 암세포가 굶어 죽게 하는 치료법이다. 4년 간 동맥을 통해 항암제를 투여하는 색전술을 11차례나 받았다. 한 달에 20번이나 해야 하는 방사선 치료도 총 3회 받았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다 빠지고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었지만 그는 견뎌냈다.
2005년쯤에는 암세포는 줄었지만 횡경막과 임파선으로 전이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이것도 이겨냈다. “4년이나 정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냈는데, 그 세월이 억울해서라도 그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횡경막은 수술로, 임파선은 방사선으로 치료하고 전체 간의 60%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했다. 2005년 9월이었다. 그가 다시 태어난 날이다.
그 시간을 이겨낸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박씨는 단연코 걷기라고 말한다. 4년간 소백산 등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산이 좋아 소백산을 제집 드나들 듯 했으니 산에 가면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색전술을 받으면서 처음엔 100미터도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계속된 헛구역질에 시달렸다.
“죽을 지경인데 왜 산에 갔냐? 걸어야 살기 때문이다. 집안 내력에 암이라곤 없었다. 유전에 의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다. 소백산을 걸으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비지땀을 흘리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스트레스는 한방에 날아간다. 암을 이기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마을 옆 하천 가를 쉬엄쉬엄 걷는 것부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소백산으로 향했다. “아프기 전에도 산을 좋아했다. 소백산 비로사에서 비로봉까지 왕복 1시간 30분이면 족했다. 비로사에서 비로봉, 연화봉, 희방사까지 2시간에 내달렸다”고 말했다. 산을 걷는 것이 아니라 거의 뛰어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반인들은 비로사 주차장에서 비로봉까지 2시간30분은 잡아야 한다. 초보자들은 3시간도 부족하다.
워낙 빨리 걷다 보니 무방공비로 오인을 받은 적도 있다. 1996년 9월 비로사에서 희방사로 내려오니 갑자기 무장경찰과 전경 수십명이 총구를 겨누고 수갑을 채웠다. 알고 봤더니 북한 특수부대원처럼 빨리 걷는 박씨를 보고 다른 등산객등이 무장공비로 신고한 것이었다.
항암치료를 받는 4년간 그는 병원에 가지 않는 날이면 매일, 평균 1주일에 서너번은 비가오나 눈이오나 소백산을 올랐다. 아침을 먹은 뒤 9시쯤 출발해서 12시까지 산에서 지냈다. “소백산은 삼림이 울창하고 공기가 좋은데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오를 수 있어 환자들이 운동하기 좋은 산”이라고 말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길에는 맨발로 걸었다. 소백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항암치료로 인한 고통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암을 극복한 비결? 살 수 있다는 의지, 병과 싸워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등산은 이 같은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요즘도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지만 수술 10년이 지나도록 재발조짐은 없다. 5년 이상 생존하면 완치라고 하니 그는 완전 나았다고 볼 수 있다. 키 167㎝의 작달막한 그는 발병하기 전 60㎏이던 몸무게가 63㎏으로 되레 늘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적당한 수준이다.
암은 극복했지만 그는 요즘 먹는 것이 다소 고역이다. 일반인들처럼 아무것이나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절반이 넘는 간을 절제한 만큼 아무래도 싱겁게 먹어야 하고, 채식 위주로 한다”며 “죽다가 살아났는데 이 정도 불편은 불편도 아니다”고 말했다. 제철 채소와 산나물, 된장, 두부 등이 박씨가 즐겨 먹는 음식이다. 입맛이 없어도 세끼 밥은 한 공기씩 꼭 챙겨 먹는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산나물은 살짝 데쳐 된장에 찍어 먹고 두부 넣고 끓인 담북장을 늘 챙겨 먹는다”고 했다.
6개월 시한부 선고를 극복한 소백산다람쥐 박재완씨. 그는 “살 수 있다는 의지와 운동, 음식 이 3가지를 잘 지켜야만 병마를 이길 수 있다”고 재확인했다. “간암 진단을 받았을 당시 중, 고교생이던 형제가 아버지 병치레 때문에 고생을 한 것이 가장 마음이 아프다”며 남은 인생을 덤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과수농사를 짓고 있다.
이용호기자 ly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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