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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눈과 몸

입력
2015.04.07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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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던 카라얀은 공연 내내 눈을 감고 지휘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음악에 도취된 듯한 느낌을 주려고 일부러 눈을 감는다고 평하는 이도 있었고, 눈을 감고 어떻게 연주자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지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카라얀의 답은 달랐다. 총보 전체를 복사하듯 기억하는 자신의 암보 방식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 보이는 온갖 시각 정보 때문에 오히려 악보를 기억해내는데 성가시다고 말했다. 우리도 공연장에서 음악에 집중하기 위해 가끔 눈을 감는다. 앞사람의 뒤통수를 지우려고 말이다.

시각은 다른 모든 감각을 압도할 정도로 많은 정보량을 처리한다. 테오리아(theoria)를 비롯해 백문이불여일견, 세계관 등에 이르기까지, 지식과 학문, 일상생활 도처에서 눈과 보는 것의 은유를 찾을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눈이야말로 철학에 적합한 기관이라고 단언했다. 다른 감각기관과 달리 오직 눈만이 스스로를 볼 수 있는 기관이기에, 반성과 사유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눈과 시각은 근대 철학이나 이성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눈이 빛날 수록 그림자도 깊어졌고, 후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도 잇따랐다. 신체와 살, 촉각과 떨림 등이 눈과 시각의 대항마로 떠올랐다. 그런데 정작 시각을 배제한 체험을 해 본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청각, 후각, 미각, 촉각만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일은 어떤 것일 지를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가끔 한밤중에 잠에 취한 채 화장실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이는 알고 있는 공간을 더듬어 가는 것일 뿐이다. 다른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도 대개 시각에 의해 매개되기 마련이다.

일상에서 시각에 조금도 의지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낯선 환경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어둠 속의 대화’ 전시다. 198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10여년 동안 전세계를 돌며 전시되다, 2000년 함부르크에서 처음 상설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이 흥미로운 전시를 기획한 이는 유대인과 독일인 혈통을 모두 지닌 안드레아스 하이네케다. 13살 때 하이네케는 아버지 쪽 친척 중에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어머니 친척 중에는 나치 협력자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충격으로 그는 사람의 우열을 가르는 기준을 되물으며 어떻게 해야 타인의 다름을 관용하고 열린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고민한다. ‘어둠 속의 대화’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6년 찾아온다. 방송사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던 하이네케가 교통사고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후배 기자를 만나면서다. 잠시 동안이라도 시각을 없애는 것보다 시각장애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어둠 속의 대화’는 여기서 출발한다. 빛의 흔적마저 지워버린 온전한 어둠 속에서 100분 동안 듣고, 만지고, 냄새 맡으며 무언가를 해야 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타인의 목소리에 그 어느 때보다 귀 기울이게 된다. 길을 이끌어주고 낯선 어둠의 공포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하다고 여기는 이에게 쉽게 말 걸고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어둠은 일상의 권력 관계를 잠시나마 지워버리고 감각을 재배치한다. 이곳에서는 낯선 이의 목소리와 손길에 자신을 내맡기고 다른 감각들을 예민하게 일깨울 수밖에 없다.

100분의 경험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눈과 신체의 이분법적 구도는 타당한지, 다른 감각과 뒤섞이지 않은 순수한 개별 감각이 존재하는지, 이를 구분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같은 철학적인 의문들. 또 시각장애인, 나아가 사회에서 약자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정치적 상상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같은 사회적인 질문들 등. 한국에서 ‘어둠 속의 대화’는 서울 북촌에서 상설 전시 중이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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