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으로 만성적자 탈출
남대구IC 근처 130여개사 성업
"성공은 하루 아침에 오지 않아… 재산 일부 사회환원 고민 중"
대구 달서구 월성동 중부내륙고속지선 남대구IC 근처에 대구화물터미널이 있다. 성서공단 등 지역 육상화물 처리의 핵심 축이다. 터미널에는 130여 개에 이르는 화물운송업체가 입주해 있고, 7만2,000여㎡의 부지에는 크고 작은 화물차가 24시간 끊임없이 들락거린다. 하지만 변판수(60ㆍ사진) 대구화물터미널 부회장이 참여하기 전인 10년 전만 해도 전혀 딴판이었다. 이용하는 화주가 거의 없어 거의 개점휴업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변 부회장이 터미널 운영에 뛰어든 것은 8년 전. 당시 터미널운영회사는 130억원이 넘는 부채와 만성적자로 경영이 엉망이었다. 8년 만에 터미널은 더 이상 입주업체를 받기 힘들 정도로 번성하고 있다. 그도 ㈜번영화물, ㈜선진로지스 2개의 화물운송업체를 이곳에서 운영할 정도다.
변 부회장이 경영참여 후 첫 조치는 시설 무료개방이었다. “임대료가 비싸다 보니 뛰어난 접근성에도 불구하고 차주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터미널이 텅텅 비었다. 일단 장이 서도록 하는 일이 시급했다. 석 달 가량 시설을 무료 개방했다. 시범운영기간 이후에도 종전 주차비의 50%만 받았다. 대성공이었다. 주차비는 내렸지만 이용차량이 그 몇 배 늘면서 회사 전체 수익성도 크게 개선됐다. 이후 이용료를 현실화했다. 그렇다고 차주나 화주들에게 손해가 간 것도 아니다. 그 만큼 일감이 늘었기 때문이다.” 터미널이 활성화한 과정을 담담히 털어 놓았다.
빈사상태에서 살린 만큼 애착도 남다르다. 터미널 안에 심은 나무의 가지치기도 남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 직접 톱과 전지가위를 들고 일일이 전지를 했다. 요즘도 사무실에 앉아 있지 않고 점퍼차림으로 현장 구석구석을 누빈다.
잘 나가는 화물터미널 부회장이지만 예전부터 부자는 아니었다. 성장기 그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한, 도둑이 들었다가 되레 보태주고 갈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그는 초등학교 5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학력미달로 군대도 면제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근검절약의 정신으로 부자가 됐다. 마음도 부자다.
“부자 되는 법? 안 쓰면 번다.” 그의 부자 되기 철학이다. “번 돈 보다 더 쓰면 어떻게 부자가 되겠나. 남의 돈 무서운 줄 모르고 펑펑 써대다가 패가망신하고, 나라까지 망하는 꼴을 종종 보지 않나. 처음엔 그 차이가 미미해도 시간이 지나면 확 달라진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쉰 밥을 먹으란 얘기는 아니다. 세상 모든 일 한꺼번에 되는 법 없다. 한 계단씩 차근차근 올라가야 한다. 분수에 맞게, 열심히, 꾸준히 하다 보면 성공의 문이 열린다는 말을 해 주고 싶다.”
어린 시절 가난을 생각하면 그는 아직도 치가 떨린다. 트럭 인부를 했던 아버지와 두부장사를 하던 어머니의 수입으로 7남매 대식구를 건사하기엔 항상 쪼들렸다. 먹을 게 없어서 술지게미에 사카린을 섞어 먹고 술에 취해 어른들에게 혼이 난 적도 부지기수다. 소풍 대신 ‘아이스께끼(하드)’ 팔아야 했던 그는 소풍 장소에서 친구를 만나 창피했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용접공으로, 신문팔이로, 화물인부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옷이 없어 누나 옷을 입었고, 신발은 검정고무신만 신었다. 밥값이 아까워 사 간 도시락이 쉬면 밥을 물에 씻어 먹었다. 그가 담배를 피지 않은 것도 건강 때문이 아니라 담뱃값이 아까워서였다.
용접일은 하는 일에 비해 수입이 시원찮았다. “13살 때 새벽에 신문 130부를 돌리면 당시 돈으로 한달 월급이 4,000원이었다. 매우 큰 돈이었다. 하루 종일 공장에 다니는 것보다 수입이 좋았다. 한국일보에서 신문배달소년 취재를 나왔더라.”
이후에도 가난의 굴레를 쉬 벗어지지 않았다. 16살 때 부친이 별세한 뒤 건설현장 잡부, 화물하역, 화물차 조수 등 닥치는 대로 했다. “버는 대로 모았다. 배운 것은 없어도 성실함이 눈에 들어왔는지 아는 아주머니가 여동생을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가정을 꾸린 게 24살 때였다. 정말 이젠 둘이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1년쯤 뒤 갑자기 실직했다. 가장 입장에서 실직은 곧 죽음과 같다.”
다시 찾은 일이 장거리 화물차량의 조수였고, 그렇게 모아 29살 때 화물차주가 됐다. 80년대 중후반에 없어진 한시택시를 몰며 더 많은 돈을 모아 5대로 불리며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필리핀 여성과 결혼한 새터민이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적지 않은 돈을 바로 부쳐준 적도 있다.
그는 요즘 청년실업난에 대해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하는데 왜 없나.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하니 그렇다. 인생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검소하고 부지런하다. 성주군에 직접 지은 집 마당에는 재활용품으로 가득하다. 자전거나 리어카 등을 손수 수리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빈 병이나 폐지를 보아 팔아서는 불우이웃돕기에 쓴다.
스스로 요즘 시대와 맞지 않은, 옛날사람이라 여기는 변판수씨. 그는 요즘 그 동안 모은 재산을 어떻게 하면 보람 있게 쓸지 자녀들과 고민 중이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 가치 있게 쓸 수 있을지를.
강은주 엠플러스한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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