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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정부는 국민의 어버이가 아니다

입력
2015.04.0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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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 사이트로 규정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4시간 동안 접속 차단 조치를 당했던 ‘레진코믹스’. 사진은 방심위의 접속 차단 안내 페이지를 패러디한 레진코믹스의 이벤트 페이지.
음란 사이트로 규정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4시간 동안 접속 차단 조치를 당했던 ‘레진코믹스’. 사진은 방심위의 접속 차단 안내 페이지를 패러디한 레진코믹스의 이벤트 페이지.

창작물에 대해 소비자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일은 중요하다. 창작자가 먹고 살 수 있어야 좋은 창작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공짜라고 생각하는 콘텐츠에 대해서까지 지갑을 열도록 유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가 인기를 얻고 있는 음원 시장이나 ‘뉴스는 공짜’라는 인식이 팽배한 언론 시장을 생각하면 쉽다.

그런데 모두가 공짜로 생각하던 웹툰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보는 유료 콘텐츠로 변모시키는 데 성공한 기업이 있다. ‘레진코믹스’(lezhin.com)다. 무료로도 웹툰을 제공하지만 무료로 풀리기 전에 돈을 내면 좀더 빨리 만화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통해 유료 시장을 열었다. 대대적 광고를 한 적도 없지만 회원 수가 무려 100만명을 넘는다.

강점은 다양성이다. ‘원로’라 불릴 만한 이름 있는 작가부터 신인까지 여러 명의 작가들이 성인 만화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웹툰을 연재한다. 웹툰 시장을 유료 시장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공로로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각종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달 25일, 갑자기 레진코믹스 접속이 차단됐다. 주로 북한 사이트, 해외 포르노 사이트, 저작권 위반 사이트, 불법 약품ㆍ마약 거래 사이트, 금융사기(피싱) 사이트 등을 차단했을 때 나타나는 불법ㆍ유해정보 차단 안내 페이지(warning.or.kr)가 대신 등장했다. 보통 사이트를 차단하기 전에는 사전에 통보를 하거나 소명을 듣는데 이런 절차조차 없이 차단해 버린 것이다. 레진코믹스에 연재되는 한 만화의 일부분에 대해 음란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음란성에 대한 판단도 헌법재판소 결정이나 그 동안 판례에 비하면 과도할 뿐 아니라, 연재물 하나 때문에 전체 사이트를 차단해 버리는 것은 소 잡을 칼로 사과껍질을 깎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항의가 빗발치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마지못해 4시간 만에 차단 조치를 해제했다. 하지만 레진코믹스가 100만 회원을 거느린 유명 사이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금세 차단이 해제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차단이 풀렸다고 해서 이번 사안이 끝났다고도 볼 수 없다. 전 국민의 머릿속을 금욕적으로 정화해야 한다는 소수의 고지식한 사람들이 방심위원이란 자리에 앉아서 정확한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차단’이라는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이 용인되는 한, 앞으로도 ‘창조경제’의 선봉에 선 콘텐츠 기업이 순식간에 도산 위기에 몰리는 일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심위의 시대착오적 성 관념을 가진 소수가 창작자의 자유를 빼앗는 다른 사례도 있다. 최근 ‘선암여고 탐정단’이라는 드라마에서 동성 여고생의 키스 장면을 심의하면서 방심위원들이 한 발언은 성소수자에 대한 심각한 차별적 인식을 보여준다. 한 방심위원은 “다수와 다른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국민들이 혐오감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나는 혐오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런 수준의 인권의식을 가진 인사가 심의위원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개인적 혐오감’을 심의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심의는 기준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정확한 기준도 없이 ‘야하다’는 이유로 사이트를 차단하여 온 국민이 못 보도록 한다든지, 자신이 혐오감을 느꼈다는 이유로 제재를 한다든지 하는 행위는 심의의 탈을 쓴 검열이다.

검열은 대한민국이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할 민주주의 국가라는 헌법정신을 부정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의 정부가 국민을 사리 분별 못하는 유아 수준으로 판단하고 부모처럼 모든 것을 대신 판단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전체주의나 봉건주의에 가깝다.

민주국가에서 정부는 국민의 어버이가 아니다. 자유롭고 열린 사고가 창작자들을 춤추게 하고 창조경제의 기반이 된다.

최진주 디지털뉴스부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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