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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 붉은군대 연전연패, '두뇌' 부족한 군사력 증강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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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 붉은군대 연전연패, '두뇌' 부족한 군사력 증강 탓

입력
2015.04.0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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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현대화·병력 늘렸지만

고급 장교 양성에는 시간 부족해

국면을 바꾼 신의 한 수

연패에도 아껴 둔 시베리아 병력, 모스크바 공방전 결정적 순간 투입

빈틈없는 군부 통제·충성 유도

잔혹하지만 유능한 최고 사령관

전쟁 지도자 스탈린 1879.12.21-1953.3.5
전쟁 지도자 스탈린 1879.12.21-1953.3.5

20세기 세계 정치를 이끈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엄청나게 많이 연구되었지만, 아직도 그에 관해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전쟁 지도자로서의 면모가 그렇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인 소비에트연방의 전쟁수행 기구가 스탈린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니만큼 이 인물을 알지 못하면 제2차 세계대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최고권력자 스탈린은 불구대천의 원수인 파시스트 아돌프 히틀러와 1939년 8월에 불가침조약을 맺고 한동안 유럽에서 번지는 전쟁의 불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41년 6월 22일에 히틀러에게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았다.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한 것이다.

기습을 당한 소련군은 연거푸 졌고 천문학적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 파죽지세로 진격한 독일군은 9월초 러시아 혁명의 요람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했고, 10월에는 소련의 심장 모스크바 바로 앞에 다가섰다. 히틀러가 호언장담한 대로 유럽은 숨을 죽였으며, 온 세상이 이 두 독재자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소련은 패망 일보직전이었다.

어떤 이는 스탈린이 불가침 조약의 효력을 맹신하고 전쟁 준비에 소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의심 많기로 이름난 스탈린은 히틀러를 믿지 않았다. 스탈린은 독일과 영국ㆍ프랑스 간의 전쟁이 적어도 수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그 동안 전쟁에 대비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가 독일과 맞붙은 지 두 달이 채 안 되어 어이없이 항복하고 영국은 섬에 틀어박혀 반격은커녕 생존에 급급해하는 상황이 빚어지면서 스탈린의 구상이 어긋났다. 그의 당초 예상과 달리 프랑스와 영국이 허약했던 것이지, 그가 순진하거나 게으른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는 스탈린이 1930년대 말에 자행한 군부 대숙청이 붉은 군대에 돌이킬 길 없는 치명상을 입혀 위기를 자초했다고 믿는다. 숙청 탓에 유능한 고위 장교가 제거돼 전쟁을 앞둔 붉은 군대가 허약해졌다는 것이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 이야기도 아니다. 우선 군부 숙청의 규모는 알려진 것보다 크지 않았고, 최고위급이 아닌 장교들은 쫓겨났다가 대개 곧 복직했다. 또, 붉은 군대가 숙청으로 허약해졌다는 주장은 숙청 전에는 붉은 군대가 강했다고 전제하는 것인데, 이 전제가 사실과 어긋난다. 숙청 전에도 붉은 군대는 약한 구석이 많은 조직이었다. 가뜩이나 약했던 붉은 군대의 전력이 군부 숙청으로 조금 더 약해졌을 뿐이지 숙청이 붉은 군대를 허약 체질로 만든 근본원인은 아닌 셈이다.

스탈린의 독재권력이 공고해지며 일명 스탈린 헌법이 제정된 1936년 스탈린(왼쪽에서 두 번째)이 소련 수뇌부와 앉아있다. 맨 오른족은 소련군 현대화를 이끈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로 이듬해 스탈린에 의해 숙청됐다. 출처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3: 러시아의 세기' (북폴리오, 2007)
스탈린의 독재권력이 공고해지며 일명 스탈린 헌법이 제정된 1936년 스탈린(왼쪽에서 두 번째)이 소련 수뇌부와 앉아있다. 맨 오른족은 소련군 현대화를 이끈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로 이듬해 스탈린에 의해 숙청됐다. 출처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3: 러시아의 세기' (북폴리오, 2007)

그렇다면 독소전쟁 초기에 붉은 군대는 왜 한숨 나오는 성적을 거두었을까? 더 큰 원인은 역설적으로 전쟁 전에 소련 지도부가 실행한 군사력 증강이었다. 전쟁에 대비해서 스탈린은 붉은 군대를 급속히 키웠다. 문제는 무기체계 현대화와 병력 증대는 금세 이루어지지만 무기를 운용하고 병사를 지휘할 능력을 갖춘 고급장교를 양성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린다는 데 있었다. 장교단은 거북이 걸음으로 자라는데 군대 규모만 토끼 걸음으로 커졌으니 중대를 지휘해야 할 장교가 사단을, 여단을 지휘해야 할 장교가 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런 군대가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데다가 풍부한 실전 경험과 만반의 준비를 갖춘 독일군에게 기습을 당했으니, 연패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어떤 이는 스탈린이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 한동안 최고사령관의 업무를 내팽개쳤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스탈린은 사태를 수습하려고 끊임없이 회의를 열고 대책을 세웠다. 하지만 기동 방어를 해야 할 상황에서 진지 사수를 강요하는 잘못된 결정으로 소련군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사로잡히는 참사가 그것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 와중에 포병대원이었던 스탈린의 맏아들까지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달리 소련은 투항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예봉은 소련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시간이 흐를수록 무뎌졌다.

1941년 늦가을에 독일군 선봉부대가 모스크바 외곽에 다다르자 소련 정부는 우랄산맥 너머 동쪽으로 도주할 채비를 하는 데 분주했고 모스크바에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때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버리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11월 7일 러시아혁명 기념일에 대중 앞에 나타났다. 이 극적인 제스처에 민관군의 사기가 확 치솟았다. 이런 분위기 반전은 열 달 뒤에 소련군이 독일군의 진격에 밀려 다시 공황 상태에 빠져들어갈 무렵에 스탈린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라는 특별 지령을 내릴 때 재현된다. 스탈린은 결정적 순간에 자기의 존재감을 과시해 승기를 잡는 데 능했다.

모스크바를 금방이라도 적에게 빼앗길 위기에서도 스탈린은 시베리아에 예비 병력을 아껴두고 있었다. 독일의 동맹국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할 경우에 대비해서였다. 도쿄의 독일 대사관에서 일하는 세기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에게서 일본의 목표가 북방이 아니라 남방이라는 정보를 얻어낸 스탈린은 안심하고 그 예비 병력을 결정적 순간에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해서 독일군을 밀어내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바꿔 놓았다. 소련군 원수 주코프 장군이 감탄한 대로, 스탈린은 결정적 순간에 활용할 예비 병력을 마련하는 데에도 능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파국을 가까스로 막았지만 그 뒤로 히틀러와 40개월 동안 혈투를 벌여야 했다.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는 긴급 보고를 1945년 5월 1일 새벽에 받고 스탈린이 내뱉은 말은 “뒈졌구나, 후레자식! 놈을 사로잡지 못해서 안타까운데……”였다. 이처럼 최종 승자는 초반에 승승장구한 히틀러가 아니라 연패 위기를 넘기고 후반에 역공에 나선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실수를 적잖이 저질렀고, 그 실수는 뼈아픈 실패로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은 스탈린이 이겼다. 무엇이 승패를 갈랐을까?

1949년에 스탈린은 고위 공산당원들에게 “클라우제비츠와 몰트케의 교리를 배우며 자란 히틀러의 장군들은 전쟁 승리가 공장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독일군의 뛰어난 전투능력은 독소전쟁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소련군에게 강타를 퍼부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휘청거릴지언정 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장기전일수록 중요해지는 것이 보급이다. 전쟁의 승패에서 보급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쟁의 규모가 커진 현대전에서 더욱 올라간다. 스탈린과 소련군은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히틀러와 독일군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좁은 영토에서 전투를 치렀던 독일보다는 드넓은 대륙에서 전쟁을 해온 러시아가 보급에 더 치중했고 더 능숙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선병사로 참호에서 싸운 히틀러보다는 러시아 내전에서 지휘 경험을 쌓은 스탈린이 전쟁과 보급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더 유리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중앙아시아 기마민족과 오랜 세월 평원에서 겨뤄온 러시아 역사의 특성도 스탈린이 보급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1940년대 전반기에 소련은 공업생산력에서 독일보다 처졌다. 더구나 전쟁 초기에 소련은 인구와 공장이 밀집된 드넓은 영토를 독일에게 빼앗긴 탓에 가뜩이나 더 불리해졌다. 전시에 쪼그라든 산업생산력과 지친 국민의 노동력을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해가며 쥐어짜내 무기와 물자를 더 많이 만들어내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성공한 인물이 스탈린이었다. 반면에 히틀러는 민간 경제를 군수생산으로 돌려 보급을 강화하는 데 주저했다. 이런 차이가 장기전에서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스탈린의 승리와 히틀러의 패배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마지막 요인은 독재자와 장군들과의 관계였다. 통념과 달리 히틀러는 독일 장군들을 휘어잡지 못했다. 1930년대에 귀족계급과 군부의 묵인과 지원 아래 권력을 잡은 대가였다. 히틀러는 눈에 띄지 않는 항명을 일삼는 귀족 출신 장군을 불신했고, 일부 고위장교들은 1944년에 히틀러를 폭탄으로 제거하는 음모를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다. 반면에 전쟁 기간 내내 스탈린은 과정이야 어떻든 군부를 통제하고 장군의 충성을 유도하는 데 빈틈이 없었다.

스탈린은 단지 공포로만 통제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1941년에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장군을 총살형에 처했지만, 그 수는 10명을 밑돌았고 그 뒤로는 그런 처형이 거의 없었다. 스탈린은 유능한 장군인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세르게이 시테멘코 등을 늘 곁에 두거나 수시로 불러 논의를 하고 토론을 했다. 그는 때로 고집을 부렸지만 기본적으로 생산적인 관계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지했다.

스탈린은 실수를 적잖이 저질렀지만, 크고 넓게 보면 괜찮은 전시 지도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는 상냥하지만 무능한 최고사령관이었던 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비에트 연방 지도자 스탈린은 까다롭지만 유능한 최고사령관이었다.

류한수(상명대 교수, 유럽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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