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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와 소통하라...책은 작가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입력
2015.04.0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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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생계형 일러스트레이터

전집 그림 그리다가 낸 첫 창작 그림책으로 수상

코 파는 이야기 영화처럼 연출해 유쾌함 선사

작가가 장난을 쳐야 아이들도 재미있지 않을까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의 어린이청소년 부문 수상작 ‘진짜 코 파는 이야기’(책읽는곰 발행)는 진짜 코 파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코 파는 장면만 나온다. 판다, 하마, 기린, 고릴라 등 여러 동물이 저마다 열심히 코를 판다. 가끔, 심심해서, 자주, 몰래, 보란 듯이, 어쩔 수 없어서 등등. 외국의 유명 영화사 로고를 변형한 그림이 박힌 앞표지부터 엔딩 크레딧이 박힌 뒷표지까지 전체를 한 편의 영화처럼 연출한 이 그림책은 기발하고 유쾌하다.

2일 저녁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북콘서트에서 작가는 수상작처럼 유쾌한 화법으로 진지한 고민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왜 이 책을 만들었는지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해 그림책 작업의 실제, 자신에게 영향을 줬거나 좋아하는 그림책, 그림책의 특성과 그림책 작가에게 필요한 것, 현재 작업 중인 신작 예고까지 아기자기하면서 알찬 내용이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2일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진짜 코 파는 이야기' 북콘서트에는 그림책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참석했다. 작가 이갑규는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그림책과 그림책 작가에 대한 생각을 들려줬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2일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진짜 코 파는 이야기' 북콘서트에는 그림책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참석했다. 작가 이갑규는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그림책과 그림책 작가에 대한 생각을 들려줬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코 파기라는 지저분한 소재가 그림책이 된 내력은 길다. 15년간 '생계형 일러스트레이터'로 살면서 전집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작가에게 이번 수상작은 첫 단행본 창작 그림책이다. 그런데 그 전부터 코 파는 그림을 많이 그렸단다.

“내용이랑 상관없이 그림 안에 장난 치는 걸 좋아해서 무의식적으로 코 파는 그림을 넣곤 했어요. 그러다 학원도 나가고 사람들 가르치다 보니 교양 있는 척 해야겠더라구요. 나도 모르게 진지해져서 안 그리게 됐죠. 그런데 어느 블로그에서 내 그림을 평가한 글을 봤어요. ‘이 작가는 왜 중간 중간에 코 파는 그림을 넣었을까’ 하고 심오하고 철학적으로 분석을 해놨더라구요. ‘어, 그런 거 아닌데?’ 했죠.

그게 계기였어요. 아예 대놓고 표현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 전에는 유치하다는 소리 들을까봐 자제하기도 했거든요. 시작은 캐릭터 작업이었어요. 어느 날 운전을 하다가 머리 위에 스펠링 네 개가 떠올랐어요. C, O, P, A. 코파. 굉장히 강렬했어요. 아, 이거다 싶었죠. 바로 작업실에 가서 이미지를 만들었죠. 고릴라, 곰, 백설공주 등 여러 캐릭터가 다 코 파는 모습으로요. 피노키오, 벌거벗은 임금님 등 왠만한 명작동화 캐릭터가 다 코 파는 그림을 그렸어요. 엄지발가락만 끼우는 슬리퍼에는 코 파다가 코피 흘리는 백설공주를 그려 넣었어요. 하하하. 핸드폰 케이스, 노트, 팬티도 만들고. 시중에 나와 있어요. 팬티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려 놓고 보니까 좀 야하더라구요.“

코 파는 이야기는 신나게 이어졌다.

“코 파는 것 하나로 참 별짓 다한다 싶겠죠. 저도 이게 뭔 짓이지 싶었어요. 그림책을 만들어 스토리를 펼쳐 보이고 싶었죠. 초안은 크게 달랐어요. 처음 붙인 제목은 ‘동물들이 몸소 보여주는 코 파는 이야기’, 마지막 장면은 코를 판 동물들이 이비인후과에 모여서 진료를 기다리는 거였죠. (출간된 책에는 엔딩 크레딧의 장소 협찬 ‘고만파이비인후과’로만 나온다). 이 책을 만들면서 처음 받은 피드백은 독자 연령대에 대한 것이었어요. 호흡이 짧다 보니 유아용보다는 영아용에 적합한데 아이들이 보고 흉내낼 수도 있으니 유아용이면 좋겠다고 출판사에서 그러더라구요. 공감은 했는데 고민이 됐죠. 유아용 치고는 짧고 뭔가 아쉽고 호흡도 좀 늘려야겠고 해서. 그래서 영화적인 요소도 고려하다 보니 서사가 생겼고 마음에 드는 책이 완성됐어요. 개인적으로 공부가 굉장히 많이 됐어요. 이걸 하면서 책은 함께 만드는 것임을 느꼈어요. 예전에는 출판사에서 마음에 든다고 하면 빨리 책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전혀 달라요. 출판사가 그대로 진행하자고 하면 싫을 것 같아요. 함께 만들어야 완성도가 높아지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자체가 성장이라고 봐요.”

'진짜 코 파는 이야기'의 뒷면지 그림은 출연자 대기실 풍경이다. 책읽는곰 제공
'진짜 코 파는 이야기'의 뒷면지 그림은 출연자 대기실 풍경이다. 책읽는곰 제공

‘진짜 코 파는 이야기'의 엔딩 크레딧에서 작가는 ‘감독 이갑규’로 나온다. 몸을 아끼지 않고 열연한 동물 배우들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본문에는 맨마지막 장면에 코피 흘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딸 하람이와 함께 코를 파면서 TV를 보다가 코끼리 재채기 소리에 놀라 코를 찔렀다.

영화처럼 연출한 이 그림책에는 유머 코드가 많다. 본문 첫 장면에서 하람이가 왼손에 들고 있던 코딱지의 행방에도 웃음이 숨어 있다. 정답은 아빠의 겨드랑이다. 겨드랑이 털에 달라붙었다. 어른들은 모르고 지나치지만 아이들은 귀신같이 안다. 여기서 작가는 청중들에게 퀴즈를 냈다.

“겨드랑이와 콧구멍의 공통점은 뭘까요? 제가 억지로 만들었습니다. 답은 ‘습하다, 털이 있다, 어둡다‘입니다. 팔을 들어보면 겨드랑이도 밝죠. 하지만 평소에는 굉장히 어두운 곳이죠. 코딱지를 왜 겨드랑이에 붙였냐 하면, 집으로 보낸 거에요.”

코 파기의 즐거움과 코딱지의 행방이라니, 55년 전통의 출판상 수상작 작가에게 듣는 이야기가 이것뿐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진지해졌다.

“독자 서평 중에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장난'이라고 쓴 어머니가 있던데 그런 말조차 좋았어요.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작가가 장난을 쳐야 아이들도 재미있을 거다, 생각하거든요. 이 책이 나름 좋은 평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공감대라고 생각해요. 어, 나도 그런데, 하는 공감대요. 여러분은 어떨 때 답답하세요? 저는 미용실에서 수건 두르고 앉아 있을 때 콧구멍이 가려우면 죽을 것 같아요. 손을 꺼낼 수 없으니 가려워도 긁을 수가 없잖아요. 코 파다가 '왕건이' 나오면 '아싸, 좋다‘ 하고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작가로서 첫 단행본을 내면서 생긴 자신감의 진짜 이유도 들려줬다.

“예전에 전집 그림을 그릴 때는 책이 나오면 누가 볼까봐 숨겨놓곤 했어요. 그런데 직접 쓰고 그린 창작물을 내니까 책임감이 생기고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졌어요. 다음 책에 대한 욕심도 생겼고요. 올해 안에 신작을 내려고 해요. 기대 반 걱정 반인데 실은 기대감이 훨씬 커요. '잘할 수 있다'가 아니라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저는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을 찾고 싶다’ 에 집중해서 그걸 발견하면 길이 열려요. 나도 놀랐어요. 어느 순간 신이 내려서 아이디어가 막 솟는 것도 아닌데 전에는 있지도 않던 생각이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날 북콘서트에는 그림책 작가 지망생이 많이 왔다. 첫 창작그림책을 낸 선배 작가로서 그는 자신이 했던 고민을 털어 놓으며 후배들을 격려하고 요긴한 충고를 해줬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아이들과 소통해야 해요. 그림책을 두고 ‘이중독자’, ‘이중코드’ 라는 말을 많이 하죠. 아이와 아이에게 읽어주는 부모, 그림책의 이중독자죠. 독자는 아이인데 작가는 어른이라는 게 이중코드이고요. 애들이 이런 거 좋아할 거야, 추측하면 안 돼요. 아이와 소통해야죠. ‘쓰레기같다’는 서평이라도 반응이 있어야 해요. 전집을 할 때는 그게 안 돼요. 만나는 독자가 편집자와 디자이너뿐이니까. 편집자 요구에만 집중하면서 애들과는 상관없는 그림을 그리는 거에요. 그게 많이 아쉬웠어요. 작가는 독자와 만나야 한다, 그게 핵심이죠.”

그림책작가들이 자주 듣는 말, 그림은 괜찮은데 서사가 약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한 마디 했다.

“서사가 약하다고 하면 글을 못쓴다고 해석하는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엄밀히 말해 글과는 상관이 없어요. 서사가 약하다는 건 개연성이 떨어진다든지 리얼리티 플롯이 약하다든지 하는 측면이에요. 글을 못써서가 아니라 연출력이 문제죠. 국내 그림책 시장은 단행본이 상대적으로 작고 전집이 큰데, 전집은 정보를 중시하는 기획물이어서 그림도 서사보다 묘사를 요구받는 편이죠. 그러다 보니 연출보다 조형에 집중하게 되면서 서사가 약해진 거에요. 묘사도 중요하지만 그림책은 이야기에요. 그림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나갈지도 고민해야 실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자리는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 6종으로 매주 한 차례, 6주 동안 펼치는 릴레이 북콘서트의 다섯 번째 행사였다. 마지막 북콘서트는 저술(교양) 부분 수상작인 사회학자 김찬호의 '모멸감'(문학과지성사 발행)으로 9일 오후 7시 30분 장충동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서 열린다.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프리즘 삼아 한국 사회를 해부한 이 책의 북콘서트는 저자 강연에 마임 공연과 현악사중주 연주를 곁들여 풍성함을 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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