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동기는 직접 느낀 수치심
1970년대 초 보수적 미국 사회
자위용품 사려다 비웃음 당해… 여성전용숍 열자마자 주문 폭주
일생을 여권신장에 헌신하다
성해방의 폭발력 굳게 믿고, 페미니즘 운동 새 지평 열어
1960~70년대는 세계 인권운동이 커다란 진전을 이룬 시기였다. 미국에서도 흑인 민권법(Civil Rights Act, 1964)이 제정됐고, 전미여성연맹(National Organisation for Women,1966)이 창설됐다. 스톤월 폭동(1969년)을 기폭제로 성소수자 평등권 운동이 폭발적으로 발흥한 것도 저 시기였다. 그 맥락을 입체적으로 살피려면 동서 냉전과 패권적 자본주의의 근황에서부터 길게 말해야 하겠지만, 당시 미국이 베트남전쟁과 반전평화운동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는 점, 즉 먼 인도차이나반도로 백인 국가권력과 남성 권력이 쏠리면서 전통 권력의 공백과 지배질서의 혼란이 야기됐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전쟁을 위해 국가는 흑인들에게도 총을 들려야 했고, 여성 노동력에 의존해야 했다. 차별적 억압으로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을 만큼 동성애자들의 사회 진출도 활발했다. 지배 권력은 인권 약자들의 평등적 대의에 수긍해서만이 아니라 권력의 절박한 필요에 타협한 측면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법과 제도의 진전이 시민 의식과 관습 속에 스미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진통이 따른다. 일상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편견에 맞서 온전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법 제도와 별개로 천부의 권리를 시민들의 감각 속에 끊임없이 노출하는 게 중요하다. 인종의 담장 너머로 흑인이 진입하고, 동성애자 커플이 손 맞잡고 거리와 광장을 활보하고, 남성이 전유한 노동과 유희의 경계를 허무는 일.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딪쳐, 더디더라도 점차 자연스러운 풍경의 일부가 되는 일은 집단이 힘과 함성으로 법 제도에 맞서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투쟁이다.
델 윌리엄스(Dell Williams)는 그 시기 바이브레이터와 딜도를 들고 고루한 성 윤리와 억압에 도전했다. 그는 70년대 초 여성 최초로 뉴욕 중심부에 섹스토이샵을 열었다. 어두침침한 홍등가 귀퉁이에서 남자가 운영하고 남성 고객들이 전유하던 그 공간을, 그래서 여성은 법이 아니라 관습과 인식과 시선의 장벽에 막혀 접근할 수 없던 그 배타의 영역을, 뉴욕 카네기 홀 인근의 번듯한 자리에 열어젖혔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했다. 그가 연 것은 작은 가게였지만 그곳은 여성의 성적 해방구였고, 그는 상품을 선전하고 팔면서 성 해방의 의식을 전파했다. “(여성의) 오르가즘이 세계를 구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바이브레이터의 전사’ 델 윌리엄스가 3월 11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1973년 어느 날, 뉴욕의 51세 독신 여성 윌리엄스는 맨해튼의 메이시스 백화점 안마용품 코너를 찾아간다. 그가 사려던 건 일본 히타치사의 ‘매직 원드(Magic Wand)’라는 물건이었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진동안마기로 출시된 그 물건이 마법적인 여성 자위기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은밀히 알려지던 때였다. 윌리엄스는 그 제품의 효능을 베티 도드슨(Betty Dodson 86)의 ‘육체와 성’ 강좌에서 들었다. 성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던 도드슨은 60년대 이후 활동 영역을 바꿔 강연과 저술, 방송활동 등으로 여성의 성 해방과 성적 자기발견을 옹호하던 선구적 인물이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그날 ‘마법의 방망이’를 사지 못했다. 세상에 알려진 윌리엄스의 당당하고 도전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그날 견디기 힘든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꼈노라고 훗날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아들 뻘인 여드름투성이 20대 남자 점원이 짓궂은 표정으로 “어디다 쓰실 거냐”고 큰 소리로 물었고, 주변의 점원과 고객들이 다 쳐다보는 상황에 혼자 몰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날 나는 텅 빈 밤색 쇼핑백을 움켜쥐고 메이시스를 되돌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여성들이 자신이 원하는 그 같은 물건을 이상한 질문 받지 않고 마음 편히 구입할 수 있는 가게를 누군가는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그는 뉴욕 서부 57번가 자신의 아파트 12층 부엌에서 창업한다. 히타치의 그 제품과 유사 바이브레이터, 여성의 자위를 옹호한 도드슨의 저서 자위 해방(Liberating Masturbation)이 그의 첫 상품이었다. 우편으로 카탈로그를 배포하고 주 문받는 우편판매였지만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주문이 폭주해 주문서가 부엌 스토브와 선반에 넘쳐났다.” 그는 이듬해 카네기홀 맞은 편 블록에 매장을 열고 ‘이브의 정원(Eve’s Garden)’이라는 간판을 건다. 개업 초기에는 남성의 출입을 금했다. 윌리엄스는 “여성들이 프라이버시를 훼손당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상품을 살펴보고 설명을 듣고 각자의 성적 취향을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썼다.
윌리엄스는 미국 연방 상하원이 수정헌법 제19조(제1절- 미국 시민의 투표권은 성별을 이유로 미국 또는 어떠한 주도 거부 또는 제한해서는 안 된다)를 통과시킨 지 2년 뒤인 1922년 8월 5일 뉴욕 맨해튼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참정권 획득이라는 커다란 승리와 이어 닥친 29년 대공황으로 미국의 여성운동은 긴 잠복기에 들어간다. 여성운동의 이른바 ‘두 번째 물결’은 60년대 반전운동과 함께 시작된다. 베티 프리댄의 여성의 신비가 출간된 게 1963년이었고, 72년 여성잡지 ‘미즈’를 창간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무명의 자유기고가로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60년대부터였다. 댄 윌리엄스는 그 물결을 올라 탄 도드라진 서퍼 가운데 한 명이었다.
2005년 출간한 자서전 정원의 혁명(Revolution in the Garden)에서 윌리엄스는 10대 후반 데이트 강간을 당했고, 임신을 하는 바람에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웠던” 불법 낙태 시술을 받은 적이 있다고 썼다. 무명 배우로 몇 편의 이름없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던 시절이었다. 그 일을 당한 직후인 45년 그는 여군(WAC, Women’s Army Corp’s)에 입대한다. 배우 경력 때문에 그는 앨라배마의 터스칼루사 군병원 위문홍보단에 배속된다. 그의 첫 임무는 피아노 등 공연 비품을 나르고 설치하는 거였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군홍보단 공연이 형편 없었던지, 약 일주일 뒤에 상급자를 찾아가 이렇게 따진다. “내가 악기나 나르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군인들을 즐겁게 하기엔 우리 가수들로는 역부족이다. 그들(부상병)들은 이미 충분히 상처를 입은 사람들 아니냐.” 그는 진짜 공연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을 충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묵살당하고 전출된다. 그는 군대를 나와 직접 라디오 쇼 프로듀서로 변신해 공연을 만들었고, 한동안 국내외 장병 위문 방송을 송출하기도 했다.(‘bitchlifestyle’의 블로거 샤론 스티븐스, 2010.10.28).
그는 재고 따지며 오래 생각하기보다 원하는 물을 만나면 뛰어들고 보는 스타일이었지만, 재능이나 사업 수완이 그리 뛰어났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60년대 초반까지 배우로 활동했지만 내내 무명이었고,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된 62년 영화 ‘the cliff dwellers’에 출연한 게 가장 눈에 띄는 배우 이력이다.(위키피디아) 당시 그는 할리우드 배우 노조에 가입, 전후 공산당원으로 활동했고 메카시 광풍에 휩쓸려 FBI의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60년대 중반 고향인 뉴욕으로 건너온 뒤 광고기획자(AE)로 변신, 비로소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꽤 안정적인 보수를 받는 커리어우먼으로 활동했다. 또 NOW의 원년 멤버로서, 여성인권 특히 섹슈엘러티 영역의 도전적인 활동가이기도 했다. 73년 6월 NOW 뉴욕지부가 주최한 기념비적인 여성 학술대회인 ‘여성 성 컨퍼런스’의 스텝으로도 일했다. 당시 토론 주제 역시 ‘성적 자기결정권’ ‘노년 여성의 섹슈엘러티’ ‘새도 매저키즘’ ‘종교와 성’ ‘관능과 마사지’ 등이었다. (nyt, 73.6.11) 그런 그가 이듬해 메이시스에서 경험한 수치심은 스스로 극복해야 할 한계와 사회에 대한 도전의식으로 불타올랐을 것이다.
미국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Touch of My Hand’란 신곡을 발표한 게 2003년이었다.
“‘I'm not ashamed of the things that I dream (나는 내가 꿈꾸는 것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
I find myself flirting with the verge of obscene(나는 음란한 막대로 혼자 즐기고 있지)
Into the unknown, I will be bold(미지의 세계로, 당당하게)
I'm going to the places I can be out of control(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갈 거야)”
자기최면을 걸 듯 “I love myself It's not a sin~(나는 나를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지)”라고 반복하는 스피어스의 노래는, 여전히 그러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의 존재와, 여전히 우호적이지 않은 사회 현실에 대한 역설적인 고백이었다. 스피어스가 세상을 향해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의 세상이 그보다 30년 앞선 74년 윌리엄스가 아파트 부엌, 또 이브의 정원을 거점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세상이었다.
올해 초 개봉한 한국 영화 ‘워킹 걸(Working Girl)’이 담고 있는 이야기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워킹 걸’은 광고회사 사원으로 워커홀릭인 한 기혼여성(조여정 분)이 망하기 일보 직전의 섹스토이샵 주인(클라라 분)을 만나 동업을 하게 되면서 관능의 세계에 눈뜨게 되고, 섹스토이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식을 서서히 바꾸며 사업가로도 성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여성이 운영하는 섹스토이샵이 현재 한국에 있는지 어떤 사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저 영화 속 이야기를 윌리엄스는 40여 년 전에 미국 뉴욕에서 실현했다. 한국은 아직 섹스토이의 국내 유통 자체가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스피어스의 노래에 대해 윌리엄스는 “지난 50여 년 사이 자위행위에 대한 병리적 윤리적 두려움(fear)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 수치심(stigma)은 여전한 것 같다. 우리가 수치스러워해야(shameful) 할 것은 바로 그 현실이다”라고 말했다.(NYT, 2015.3.13)
윌리엄스는 거의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60년대 초 약 1년간 결혼생활을 했지만 자녀는 없었고, 훗날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그 결혼 역시 무효로 판결 났다. 그는 한 때 여성과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적은 없었다. 골반뼈 골절과 감염 합병증으로 병원에 머물던 그는 숨지기 이틀 전 퇴원 서류에 직접 서명하고 뉴욕 자택에서 숨졌다.
그를 임종한 비서 엘리자베스 그린 코헨은 “윌리엄스는 자신이 이뤘거나 이루고자 했던 일에 대해 늘 ‘나는 단지 여성의 권리가 보다 신장되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뉴욕프레스 인터뷰에서 말했다.(05.3.19) 그와 수십 년 동안 함께 일한 이브의 정원 현 매니저 킴 이브리스빅(Kim Ibricevic)은 “윌리엄스는 섹스의 정신적인 면을 중시했다”며 “만일 모든 여성이 오르가즘을 경험한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라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이브의 정원 홈페이지는 그의 부고를 전하며 “윌리엄스는 우리 시대 이브의 역할이 창피스러움에 주눅 든 여성들을 각자의 성적 능력과 감각, 그리고 관능을 자각한 강하고 활력있는 여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고 썼다. NOW 뉴욕지부장인 자크 케발로(Jacqui Ceballos)는 “여성의 성적 무지에 대한 델 윌리엄스의 자각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소중한 자극제가 됐다”고 기렸다. 비치라이프스타일의 섹스칼럼니스트 스티븐스는 “윌리엄스는 떠났지만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수행했던 미션과 여성의 관능에 대한 열정은 자신이 떠난 뒤로도 쉼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썼다.
그리고 윌리엄스 자신은, 전문 필자 린 베누치와 함께 출간한 자서전의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나는 오르가즘을 경험한 여성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살아왔다. 성적으로 억압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억압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억압당하지 않는 여성은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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