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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되지 않는 상실의 고통… 그래도 내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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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되지 않는 상실의 고통… 그래도 내달려야 한다

입력
2015.04.0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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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흔적 좇는 유명 사립탐정

인류 평화 이룰 남성 찾는 여성

중일전쟁 중 상하이는 가혹함 안겨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김남주 옮김 민음사·452쪽·1만4,500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김남주 옮김 민음사·452쪽·1만4,500원

수많은 강박 중 윤리에 대한 강박만큼 결과가 처참한 것도 없다. 그건 애초에 기름이 물이 되기를 꿈꾸는 것만큼 가망 없는 일이라, 대자연 혹은 운명으로부터 지독하게 조롱을 당한 뒤 제 누추함을 인정하는 수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장편소설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개인사의 불의를 해결함으로써 세상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던 한 탐정의 이야기다.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중국 주재 영국 기업에서 일하는 아버지 덕에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안락한 집과 상냥한 엄마, 쾌활한 아버지에 둘러싸여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외국인 거주지 바깥으로 한 발짝만 나가면 오전 햇살 아래 늘어진 중국 빈민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때는 1900년대 초,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대량으로 밀수출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시점이다. 크리스토퍼의 아버지는 아편을 수입해 중국인들에게 파는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경멸하며 아편 반대 캠페인의 주축으로 활동한다.

어린 크리스토퍼가 다가올 비극의 필연성을 눈치채기도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실종되고 소년은 영국의 이모집으로 보내진다. 그는 그곳에서 은밀하게 탐정의 꿈을 키운다. 세상의 모든 악을 척결해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하고 최종적으로는 실종된 부모를 찾기 위해.

성인이 된 크리스토퍼가 파티에서 만난 세라 헤밍스는 좀 다른 방법으로 인류에 공헌하고자 한다. 각종 사교모임을 좇아 다니며 저명인사들과 면을 트는 데 혈안이 된 세라는, 그러나 속물적으로 보이는 행동 이면에 굳건한 신념을 품고 있다. 바로 인류 평화의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남자와 결혼해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 결국 국제연맹 창설에 기여한 아버지뻘의 남자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 세라는 그와 함께 중일전쟁의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상하이로 떠나고, 이와 맞물려 크리스토퍼도 필생의 숙제를 풀기 위해 20년 만에 고향으로 향한다.

상하이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운명은 혹독하다. 세라의 늙은 영웅은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자 도박에 빠져 살며 자신의 명예로운 노후를 망친 아내에게 모든 원망을 돌린다. 크리스토퍼는 기억을 더듬어 부모의 흔적을 좇지만 매번 마주치는 상하이의 상류층 인간들에게 신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아득한 대포 소리를 배경으로 칵테일 잔을 부딪치고, 게임 내기하듯 전쟁 국면을 점치며, 이내 싫증난 듯 무희들의 춤으로 눈을 돌리는 그들을 보니 악을 척결하겠다던 포부가 스스로 우스워지는 것이다.

일본계 영국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1989년 '남아 있는 나날'로 부커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다섯 번째 소설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 민음사 제공
일본계 영국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1989년 '남아 있는 나날'로 부커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다섯 번째 소설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 민음사 제공

우여곡절 끝에 만난 필립 삼촌이 크리스토퍼에게 들려준 과거의 비밀은 그의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아버지가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풍요 대신 윤리를 택한 어머니에게 어떤 대가가 주어졌는지, 크리스토퍼가 탐정으로 명성을 떨치는 동안 그의 식비와 학비는 누가 조달했는지.

정의를 구현하는 건 선함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때묻은 진실 앞에 크리스토퍼는 비로소 어깨의 짐을 벗는다. 그러면서도 고아들, 넓게는 상실한 자들이 어째서 그런 강박의 삶을 살아가는지 설명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사라진 부모의 그림자를 오랜 세월 뒤쫓으면서 고아로서 세상과 대면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 임무를 완수하려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의 부재 때문에 인생의 목표가 추적이 돼버린 주인공의 삶은 일본계 영국인인 작가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다섯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해 평생 이방인으로 살았을 작가에게, 뿌리를 규명하는 일은 원하든 원치 않든 풀어야 할 과제였을 것이다.

미스터리의 가면을 쓴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상실을 경험하고 평생 그림자를 좇아 살게 된 인생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 같다. 세상은 우리의 상실에 비웃음으로 화답할 뿐이지만, 그 상실이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삶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까지 기여했다면 그것이 우리가 받을 보상이 아니겠느냐고.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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