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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까마귀가 날면 시작되는 수사

입력
2015.04.0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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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펀치'의 한 장면. 최근 검찰의 부정부패 수사는 드라마에 나오는 검찰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SBS 드라마 '펀치'의 한 장면. 최근 검찰의 부정부패 수사는 드라마에 나오는 검찰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수사의 시작도 왜 그렇게 시작하냐. 대통령이 관피아 (수사) 하라고 했다고 그제야 난리치고. 그래서 (국회의원들 비리가) 나온 거 아니냐. 그게 지시해야 할 일이냐. 늘 해야 할 일이지. 시간 맞춰서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하고… 그게 강아지지.”

특수통 검사 출신의 A 전 검사장(현 변호사). 그의 반말은 친근감의 표시이니 그대로 옮기자면 이랬다. 지난해 8월, 검찰의 특별수사(권력형 비리수사) 기획을 하느라 평소 친분이 있던 A 전 검사장에게 연락했다가 “말만 특수부지 뭐, 다 없어졌는데”라며 되레 호통을 들었다. “(정권의) 말을 잘 듣는 수사로 전락했다”는 요지였다.

정권의 하명을 받고 검찰이 움직인다는 의심은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제 그것이 눈에 보이더라도 개의치 않는 정도가 됐다. 3월 12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방위산업, 해외자원개발 비리, 대기업 비리를 예로 들고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자, 다음날부터 검찰이 포스코건설, 한국석유공사, 경남기업, 동국제강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어 “부정부패 척결”을 언급했으니, 정권은 지지율 상승 등을 위해 검찰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검찰은 그래도 늘 그것이 자존심이 상하나 보다. 정의롭고, 독립적이어야 하고, 권력의 부정부패를 파헤쳐야 하는 검찰이 권력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것처럼 비춰지니 말이다. 때문에 검찰 간부들은 요즘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대기업 수사의 ‘순수성’을 강조하느라 바쁘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수사였다” “검찰 정기인사 후 각 부서들이 새로운 수사에 착수할 때가 됐다” “작년에도 기업 수사 많이 해오지 않았느냐”등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이지, 정권이 시켜서 나선 것은 아니라는 뜻.

그러나 귓가에 울리던 A 전 검사장의 분개에 찬 목소리를 떨칠 수 없는 것처럼, 까마귀의 그림자 또한 떨칠 수 없는 실재인 것 같다. 이번 사례만 아니라, 지난 수사들을 훑어보면 더욱 그렇다. 작년과 재작년, 이석채 전 KT 회장과 임영록 전 KB금융지주 회장이 “나가 달라”는 정권의 압력을 받아들이지 않자, 검찰은 이들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KT를 3차례 압수수색 했고, 임 전 회장 수사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가 직접 나섰다. 수사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아울러 지난해에는 세월호 참사 이후 관료들과 업계의 유착이 참사의 근본적이 이유라는 지적이 제기됐고,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대적인 ‘관피아(관료+마피아)’수사가 있었다. 검찰은 여야 국회의원들이 철도비리, 입법로비 등에 연루된 사실을 밝혀내고 재판에 넘겼다. A 전 검사장의 지적대로, 하라고 안 했으면 안 했을 수사였을까.

검찰의 진짜 힘은 수사력이 아니라, 수많은 범죄첩보 중에서 어떤 수사를 하고 어떤 수사를 하지 않을지(혹은 미룰지) 고를 수 있는 (기소독점권에서 파생된) 권한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한 태광실업 수사, 이명박 전 대통령을 겨냥한 자원외교 수사를 할 것이지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대검찰청 관계자는 “지검에서 ‘이것 수사하겠다’고 올리면 그대로 한다”고 순진무구한 말을 한다.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에 어떤 핫라인이 개설돼 있는지, 누가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을 주문하는지 내막은 늘 베일 속에 있다.

정권에 의한 하명수사가 남발되는 사회에서는 이전 정권에 대한 보복 수사는 쉽지만, 현재 권력의 부패를 적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 상황에서, 검찰조직이 정의감과 권력감시라는 제1의 명제만으로 수사할 대상을 결정하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이지 싶다. 그래도 그것을 꿈꾸는 검사들이 있다면 수많은 패배 속에서 때때로 작은 승리라도 쟁취하기를 바란다. A 전 검사장은 당시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얌마 됐어 그만해. 속상해서”라고 맺었다.

이진희 사회부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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