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재능을 꽃피우자

입력
2015.04.02 15:17
0 0

2004년 4월, 만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박이소 작가는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며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어눌하지만 정성 들여 붓글씨로 ‘노력’이라고 쓴 각목을 꽂은 비루한 화분 사진, 더 어눌하게 쌓인 벽돌과 몇 개의 꽃 모양을 그려서 치장한 그의 드로잉에는 ‘열심히 노력하여 재능을 꽃피우자’라는 문장이 쓰여있다.

재능을 꽃피우려면 사력을 다해야만 한다고 종용하는 세태를 풍자하는 것인지 마른 각목에 꽃을 피우려 애쓰는 것 같은 어리석음에 대한 반어적인 충고인지 아니면 열심히 헛수고를 거듭하는 것이 예술가라는 자조 섞인 농담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그의 드로잉은 알쏭달쏭하다. 본명은 박철호지만 예명인 박모 혹은 박이소로 불렸던 작가의 작업에는 이렇게 여러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중층적 의미의 역설과 밍근하게 허를 찌르는 유머가 자주 등장한다.

그의 행적과 작업의 면모들을 되새기는 것도 좋겠지만 오늘 내가 이 문장을 떠올린 것은 엉뚱하게도 근래에 청년 미술가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오묘한 활력과 일련의 움직임들 때문이다. 역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열심히 노력해도 재능을 꽃피우기 힘들어 보이는 창작 환경에서 20, 30대가 주축이 된 소규모의 공간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은 현재 미술계의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지난달 29일 이 공간들 중 하나인 상봉동의 ‘교역소’에서 ‘미술생산자모임’ 주최로 열린 공개토론회의 자료집에는 이들과 비슷한 또래인 강정석 작가가 쓴 ‘서울의 인스턴스 던전들’이라는 제목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경향을 ‘대규모 다중 사용자들의 온라인 게임 네트워크’에 빗대어 꼼꼼하게 분석하고 지지한다.

글에 따르면 과거의 대안공간과 달리 이들은 미술계에서 독특한 위상을 가진 거점이 되려는 욕망이 거의 없으며 그저 연결 링크만을 유지한 채 ‘작가와 전시, 공연 등이 지나가는 통로’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원래 공간을 운영할 마음이 없었던’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매해 쏟아지는 청년 작가들은 주류 미술계의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활동을 펼칠 장이 필요하며, 이곳에서 벌이는 행위의 휘발적인 성격은 기존의 전시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수행성을 담보하며 창작자들에게 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토론회의 발표자였던 ‘미술소비자모임’은 이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인터뷰를 했는데 여기에 수록된 이름만도 무려 17개에 달한다. ‘공간 사일삼’ ‘구탁소’ ‘지금 여기’ ‘아카이브 봄’ ‘오픈베타공간 반지하 B1/2F’ ‘800/40’ 등의 물리적인 공간도 있지만 ‘인디언밥’이나 ‘크리틱-칼’과 같이 온라인에 기반을 둔 웹진, 매해 장소를 달리 하며 청년작가들의 영상작업을 소개하는 플랫폼인 ‘비디오릴레이탄산’ 도 있다. 그래서 설문지에는 공간이라는 말 대신 ‘신생 독립 플랫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또한 기성 평론가의 제언에서 촉발된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들의 상설 전시, 교육, 아카이빙을 할 수 있는 공간인 ‘청년관’의 신설을 요구하며 신진 작가들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 마련을 주장한다. 신생 플랫폼이든 청년관이든 주체들의 선택은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며 달리 갈 곳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온라인을 적극적인 홍보의 도구로 활용하고 의견을 개진하며 그 과정에서 내용적으로도 진화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이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 어떤 의미의 결과를 도출할 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에너지의 교류만큼은 무엇보다도 긍정적으로 보인다. 먼저 이들은 스스로 흥미로운 방식을 찾는 데서 힘을 얻었으나 기존의 미술제도에서 소외되거나 쉽사리 흡수되지 않도록 그리고 오직 자신들만이 서로의 관객이 되지 않도록 여러분들의 응원과 지원을 바란다.

이정민 미술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