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혼자 흥얼거릴 때가 많다. 주로 승객이 별로 없는 버스에 앉아 있을 경우에 더 그런다. 차창에 머리를 살짝 댄 채, 목 안으로 소리를 짓누르며 호흡을 잡아 당기면 목젖 근처에 어떤 소리가 떠 있는 상태가 된다. 밖으로 나가는 소리는 그리 크지 않다. 차량의 소음 탓에 외려 오묘해진 공명이 목과 귀 사이의 통로에서 진동한다. 손가락으로 한쪽 귀를 막아 스스로 모니터링하기도 한다. 고음일 때는 소리가 더 작아져 목구멍 깊숙이 할 말을 참는 듯한 상태가 되고, 저음일 때는 소리가 커져 혀 뒤에서 뭉친 소리 덩어리를 살살 어루만지듯 달래줘야 한다. 꽤 오래된 습관이자 놀이다.
이런 습관이 내 목소리를 변화시켰다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다. 밖으로 터뜨려야 할 것들이 안으로 고여 스스로를 긁어대고, 정확하게 결을 다듬어야 할 것들이 어떤 원형질 상태로 응혈져 둔탁하게 뭉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듣기에 약간 과분한 허스키 보이스가 되었다. 어릴 때 곧잘 불렀던 노래들은 대개 미성을 과시하는 곡들이었다. 지금 그 노래들을 가끔 상태 좋게 부르면 지인들이 의아해하곤 한다. 나도 약간 놀란다. 기똥차게 잘 해서가 아니다. 세월의 어떤 녹(綠)이거나, 오류로 인해 드러난 고유의 특성 같은 것들의 기발한 자정 능력에 놀라는 것이다. 착오와 과잉으로 부식된 녹슨 목소리로 나는 나만의 오류투성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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