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ㆍ통곡으로 가득했던 팽목항
오빠 찾던 소녀는 간 데 없고
봄볕에 낚싯대만 한가로이…
실종자 가족은 아직 그 자리
선체 인양 소식이 유일한 희망
"기다린다는 사실 알아줬으면…"
지난달 29일 밤 9시 전남 진도군 임회면 서망항. 출어하기에는 이른 때였는지 어선 20여 척만 올망졸망 정박 중이었다. 어두운 바다, 인적 없는 부두, 단조로운 파도 소리 사이로 멀리 개 짓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1년 전, 그러니까 지난 해 4월 16일 밤은 달랐다. 기자가 본 밤바다는 조명탄으로 밝았고, 부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 틈에 단원고 박모(17)양의 어머니도 있었다. 낚싯배를 빌려 타고라도 딸이 갇힌 밤바다 가장 가까운 자리까지 가보겠다고, 딸을 구조하려고 애쓰는 이들의 모습이라도 봐야겠다고 나선 길이었다. 오들오들 떨며 뭍에 선 어머니는 하지만, “내 딸이 저기 있는데 왜 수색작업 안 해”라며 오열했다. 함께 승선했던 10여 명의 다른 실종자 가족들도 가슴팍을 치며 흐느꼈다. 그들이 본 것은 주황색 기름펜스를 치는 보트뿐이었다. 구조 인력의 분주한 자맥질도 본격 수색 가이드라인도 없었다. 정부가 약속한 ‘총력 수색작업’은, 적어도 그 날 그 시각에는 없었다. 참사 당일 탑승자와 구조자 숫자조차 제대로 집계하지 못한 정부였다. 그날 심해만큼 깊은 절망을 안아야 했던 실종자 가족들은 이튿날 해경 경비정으로 다시 사고해역을 다녀온 뒤 더 깊은 슬픔에 젖어야 했다. 한 해경은 “낡은 여객선에 물이 안 찼을 리가 없다. 실종자 생존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의 예측이 현실로 확인돼가던 그 냉엄한 시간. 그리고 절망과 슬픔이 분노로 또 체념으로 잦아든 지난 1년의 세월. 바다와 항구는 진부하리만치 그대로였다. 과연 우리는, 이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30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1주년, 잔인한 4월을 앞두고 한국일보 취재진은 참사의 현장 진도를 다시 찾았다. 진도대교에 들어서자 숨통이 조여지는 느낌을 받았다. 세월호 참사 취재는 불편하다. 실종자 가족 수백 명의 통곡과 오열, 실신을 근 한 달 동안 바로 곁에서 보고 듣고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 또 그곳은 언론이 마땅히 느껴야 할 자책과 죄의식의 현장이기도 했다. 우리의 재난보도는 바람직했던가 하는 모진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공간. 무엇보다 아직 오빠가 입혀준 구명조끼로 가까스로 구조된 권지연(6)양이 기다리는 혁규군 등 실종자 9명의 시신이 수습되지 못했다. 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사고 수습이 마무리되려면 세월호 인양으로 정부가 약속한 실종자를 찾아야 하고, 유사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실마리라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무심한 진도의 봄은 칼 바람이 유난하던 지난해 4월의 아픔을 털어내려는 듯 따사로웠다. 길가에는 개나리가 만개해 있었다.
아비규환이던 진도실내체육관도 참사의 흔적을 거의 지운 상태였다. 이달 27일 열릴 전남체육대회를 앞두고 조명등 교체 작업이 한창이었다. 체육관 뒤편 육상 단거리 트랙 공사장의 망치질 소리도 요란했다. 유일한 흔적이라면 물류창고에서 찾은 세월호 모형배였다. 실종자 유가족 500여명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구조 소식을 기다리다 탈진하고 쓰러지던 광경이 흔히 눈에 띄던 체육관이었다. 참사 다음날 현장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또 구조의 ‘골든 타임’ ‘에어포켓(선체 내 공기주머니)’같은 말 한두 마디에 희망과 절망이 극적으로 엇갈리던 곳. 하지만 끝내 기적은 없었고, 체육관의 희망은 시신을 수습해 유가족이 되는 것으로 바뀌어갔다. 시신 인양 소식이 들릴 때마다 남은 이들의 속은 타 들어갔고, ‘나만 남게 되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으로 ‘자식 찾고 장례 치르고 다시 체육관에서 끝까지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발길을 팽목항으로 돌렸다. 팽목항 가는 길에 마주치는, 산 아래 마을의 지붕 낮은 집들과 마을을 감싼 논밭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난해 11월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가족들이 철수하기까지 약 7개월 동안 숱하게 오간 60리(실제 23㎞) 길. 그 길을 45인승 대형버스는 오전 5시부터 오후 7시까지 매일 30회씩 왕복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봄을 보지 못했다. 봄을 찬탄하는 일조차 죄가 되던 때였다. 1년 전 팽목항 선착장에서 이미 주검으로 인양된 오빠를 기다리던 한 소녀를 만난 기억이 났다. 그 중학생은 쪼그려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안전한 곳으로 가족 여행 가고 싶다”고 말했다.
시신을 실은 해경 경비정이 입항하던 선착장에는 낚시꾼들이 쳐놓은 낚싯대가 10여 개 한가롭게 도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수습된 주검의 ‘신원 확인소’도, 밤낮없이 진도 밤하늘을 찢던 유족들의 비명과 통곡은 물론 사라졌다.
시신은 팽목항에서 1시간 거리인 목포 병원들의 장례식장에 임시로 머물렀다. DNA 채취 결과가 나온 시신은 안산으로, 인천으로,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지난달 30일 오전 찾은 목포 한국병원의 장례식장은 여느 장례식장과 다를 바 없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은 침통하면서도 경건했다. 그러나 지난해 4월은 달랐다. 팽목항의 바람을 견디느라 대다수 유가족들은 등산복 차림이었고 취재진의 옷차림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을 잃고 넋을 잃은 한 아버지에게 한 기자가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라며 마이크를 들이댔던 곳이 거기였다.
간혹 시신의 신원이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침몰 다음날인 17일 오전 목포 중앙병원 장례식장에 황망하게 들어선 민영이(가명) 아버지는 해경이 발표한 사망자 명단에서 딸의 이름을 보고는 시신 확인을 위해 팽목항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크지 않은 키에 살짝 구부정한 등을 가진 그는 장례식장 뒷문에서 시신 안치소로 이어진 좁은 길을 허우적거리듯 조바심 내며 헤쳐갔다. 하지만 그는 한참 만에 밝은 얼굴로 나오더니 “우리 애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다시 희망을 안고 팽목항으로 향하던 그 역시 며칠 뒤 딸의 시신을 안아야 했다.
참사 엿새째였던 22일 새벽, 팽목항 부둣가 한 켠에서 흘러나오는 긴 통곡에 잠을 깬 일이 있다. “아가, 엄마 냄새 나잖아. 어서 따라 나와. 제발 살아 돌아와….” 수십 동의 대형 텐트 중 하나, 스티로폼 바닥에 누워 얕은 잠에 빠진 듯했던 민영이(가명) 어머니가 조용히 일어나 텐트 밖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뒤따라 나갔지만 이내 그를 놓치고 말았다. 새벽에 종종 일어나 나간 그는 어디서 무엇을 찾다가 오는 거였을까?
팽목항 방파제 끝에는 계란 모양의 전등으로 장식된 빨간 등대만 그날의 표식처럼, 희망의 비손처럼 우뚝 서 있었다. 지난 해 봄 내내 모두가 기원했던 ‘희망을 잃지 마세요’부터 여름과 가을을 달궜던 ‘수사권 기소권 보장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거쳐 겨울과 함께 등장한 ‘제대로 된 진상규명’ ‘온전한 인양’까지. 각 국면마다 중심에 떠오른 구호들이 노란 리본에 적혀 방파제에 나부꼈다. 그 리본들은, 좌절한 구호들처럼 바닷바람에 삭아가고 있었다.
실종자 9명도 아직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 있다. 지난해 11월 정부가 수색종료를 선언했기 때문에 선체 인양은 사실상 유일한 희망이다. 가족들 중 홀로 구조된 지연양은 아직 바닷속에 있는 아빠와 오빠를 찾고 있다. 큰아버지 권오복(61)씨는 실종자 가족 중 유일하게 팽목항 가주택 2번방을 지키며 떠나지 않고 있다. 그는 “분명히 9명 다 배 안에 있는데 정부는 의지가 없다”며 “인양 계획이 발표되고 바지 크레인이 작업에 착수하는 것만 봐도 상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양쪽 폐 일부를 잘라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이영호(46)씨는 누나를 찾아 주말마다 팽목항에 온다. 사고 해역을 마주한 분향소에는 희생자 295명의 영정이 있다. 실종자 가족들도 분향소에 영정을 넣고 유가족이 되는 게 소원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씨는 방파제에서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말했다. “우리가 죄 짓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거만 알아줬으면 합니다.”
우리 두 기자가 진도에서, 팽목항에서 그 때를 더듬는 동안 서울에서는 4ㆍ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유가족들은 다시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1주년을 맞는 16일까지 ‘416시간 연속 농성’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자의 발걸음은 그 때보다 더 무거웠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다시 잔인한 4월을 맞고 있다.
진도=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진도=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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