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에 ‘봄 바람’이 완연하다. 올 시즌 프로야구는 역대 최다 715만 명(2012년)을 뛰어넘어 840만 명 가까운 관중 돌풍을 기대하고 있다. 제10구단 kt의 합류로 탄력을 받은데다 지난해 팀 당 126경기에서 올해는 144경기로 경기수가 늘어난 까닭이다. 실제 지난 주말 열린 개막 2연전 뚜껑을 열어보니 15만명이 넘는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 프로축구에서도 클래식(1부 리그), 챌린지(2부 리그) 관중 모두 두 자릿수 증가세다. 4월에는 골프, 마라톤, 테니스 등 다른 야외 스포츠도 본격 기지개를 켠다.
하지만 콧등을 간지럽히는 춘풍에 취하기 앞서 4월에 기억해야 할 인물이 하나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을 지낸 고 이상백(1904~1966년) 박사다. 타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 거의 잊혀진 이름이다. 지금 선생을 기억하는 이는 고령의 일부 체육인들을 제외하고 없는 편이다. 그러나 선생이 한국 스포츠를 위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체육인들의 대오각성이 요구된다.
대구에서 태어난 선생은 1923년 유학 중이던 와세다 대학에 일본 최초의 대학농구팀을 창설한 뒤 일본 농구협회까지 신설하는 추진력을 보여줬다. 일본 농구계가 선생을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다. 일본 체육회에서도 선생이 비록 식민지 조선 출신 청년이었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거스를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일본 체육회 임원으로서 1932년 LA올림픽과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경험한 선각자였다. 조선인 최초의 올림픽 참가였다.
선생은 광복 직후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한국 스포츠의 백년대계를 구상했다. 첫 걸음으로 선생은 1945년 11월 조선 체육동지회 결성을 주도해 1938년 강제 해산된 조선체육회를 부활시켰다. 선생은 다음 단계로 조선 올림픽위원회를 설립해 IOC가입을 서둘렀다. 2차대전 종전에 따라 올림픽 재개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IOC 가입은 최소 5개 경기단체가 국제 경기연맹 정식 회원으로 등록해야 가능한 상황. 선생은 농구, 육상, 축구, 복싱, 역도, 사이클 등 6개 단체의 정관을 영문으로 번역해 국제 경기연맹에 제출하는 한편, IOC 부위원장 겸 미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던 에이버리 브런디지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이로써 한국은 1947년 6월20일 제41차 IOC 총회에서 50번째 정식 회원국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한국의 아시아경기연맹(AGFㆍ아시아올림픽평의회 OCA의 전신) 가입도 온전히 선생의 ‘인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생이 1930년대 중반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를 지내면서 아시아 스포츠 거물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의미다. 선생은 특히 일본 체육회를 움직여 농구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는 농구 본토 미국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겼고, 브런디지와 가깝게 지낸 계기가 됐다. 선생과 브런디지는 베를린올림픽 농구 심판으로 함께 활약하는 등 인연을 이어갔다.
생전 선생이 ‘손때’를 가장 많이 묻힌 농구계는 1976년 그의 10주기를 맞아 ‘이상백배 한일대학농구대회’를 신설해 그를 추모했다. 올해 38회를 맞이한 이 대회는 매년 양국에서 번갈아 개최된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도 1974년부터 1994년까지 아시안게임 최우수선수에게 선생의 호를 딴 ‘상백배’(想白盃)를 수여해 선생을 기억하도록 했다. 그러나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상백배는 아시안게임 최대 후원사 기업의 이름으로 교체됐다.
대한체육회는 지난 1월 스포츠인 역사보존 사업의 일환으로 원로체육인과 스포츠영웅에 대한 구술채록과 영상(출판)물제작,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올해 안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달의 체육인물’을 선정해 널리 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 까. 이달 14일이 선생의 타계 49주기다.
최형철 스포츠부장 hc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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