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에 대한 추억이 있다. 한국일보에 입사했던 1983년 여름, 경남 통영시 욕지도에 자연생태 취재를 갔었다. 태어나 자랐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일주일간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뱃전, 선친의 친구분이 라면박스 하나를 짊어지고 뛰어와 올려 주셨다. 병아리기자 최초의 촌지(?)였던 셈이다. 살짝 들춰보니 그날 새벽 잡아서 다듬어 비닐 봉지에 꾹꾹 싸서 담은 흑염소였다. 당시 기사를 근거로 이듬해 11월 욕지도 모밀잣밤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343호로 지정됐다.
▦염소와 친근했던 한려수도 섬 주민들은 올해와 같은 을미(乙未)년 양띠를 염소띠라고 한다. 고급스런 ‘양젖’을 먹었다지만 사실은 ‘염소젖’이었다. 염소는 goat, 양은 sheep이니 다른 짐승이다. 수 천년 전 건조한 중앙아시아 바위산에 살던 들염소가 잡혀와 가축으로 길러졌는데, 아직도 스스로 야생인 줄 알고 사람을 피해 다닌다. DNA가 그래서인지 물은 거의 찾지 않고 나무의 잎과 껍질만으로 살아간다. 남ㆍ서해 해상국립공원 무인도 바위섬이 최적의 방목지가 됐던 이유다.
▦털 색깔에 따라 흑(黑ㆍ검정) 갈(褐ㆍ갈색) 회(灰ㆍ잿빛) 백(白ㆍ흰색) 적(赤ㆍ빨강) 등 다양하지만 흑염소가 99% 이상이다. 염소고기가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모두가, 특히 여성들이 잘 안다. 문제는 ‘수염 난 소’라는 이름답게 나무의 잎과 껍질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고 소처럼 방귀를 엄청나게 뀌어댄다는 것이다. 고유식물 훼손과 메탄ㆍ암모니아가스 살포를 이유로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100대 악성 외래종’으로, 우리 환경부는 ‘생태계 위협성 2종’으로 분류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고유식물 보전을 위해 섬에 방목된 염소들을 포획ㆍ구제 중이라고 한다. 2007~2014년 남ㆍ서해 17개 섬에서 2,612마리를 잡아냈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일이다. 헌데, 기생충 박멸을 연상케 하는 ‘구제(驅除)’란 용어가 마음에 걸린다. 흑염소 떼를 내륙 사육장에서 구경하는 것과 뱃길 바위섬 절벽에서 만나는 것은 다르다. 적정한 개체 수를 관리하는 것도 공단의 의무다. 흑염소가 산양처럼 뛰어다니는 바닷가 기암절벽, 이미 해상국립공원의 소중한 생태계가 돼 있다.
정병진 논설고문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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