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일본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한 선생님이 초등학생 딸을 위해 작은 기념품을 부탁했다. 무민(Moomin)이라는 캐릭터가 있는데, 내가 가는 도시에 그 캐릭터로 이루어진 카페가 있다고 한다. 혹시 그 곳을 방문한다면 작은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 하나를 부탁했다. 딸이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일정이 끝난 후 잠시 그 카페에 들렀다. 하얗고 포동포동하고 따듯해 보이는 하마같기도 하고 곰같기도 한 무민이라는 캐릭터와 가족, 친구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나에게는 낯선 캐릭터인 무민이 궁금해졌다. 무민은 핀란드의 한 작가가 60년도 전에 쓴 그림동화의 주인공이었다. 무민의 가족과 친구들의 다양한 이야기로 이루어진 동화책이 40여 개국의 아이들에게 읽힌다고 하고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인기가 많다고 했다.
작은 열쇠고리와 그림이 새겨진 손수건을 사고 주위를 둘러보니 큰 인형들과 화면을 채우고 있는 무민의 모험들, 포크와 나이프에도 캐릭터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연필, 머그컵 등 모든 것이 그 캐릭터들로 채워져 있었다. 찾아온 김에 나도 카페에 앉아 음식을 시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과 같이 온 가족, 친구끼리 와서 추억을 더듬은 20대, 연인들. 내 앞에는 큰 인형이 앉아 있다. 인형을 앞에 두고 캐릭터 모양의 포크로 먹으니 어린 동심으로 돌아간 듯 했다. 심지어 음식에도 무민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 나도 모르게 웃게 됐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으니 5년 전 핀란드를 방문했을 때가 생각났다. 당시 같이 갔었던 동료가 중간의 일정을 쪼개어 무민월드라는 곳을 꼭 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그 캐릭터을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기차로 2, 3시간이나 걸려 찾아 가는 것에 공감이 어려웠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동료에게 추억과 즐거움의 대상인 무민의 고향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당연하였던 것이다.
추억이 묻어 있는 캐릭터는 단순한 인형과 단순한 동화책이 아니다. 나와 함께 웃고 나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친구와 같다. 누군가는 물건을 팔기 위한 상술이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상술에서 행복을 얻고 있다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캐릭터를 보면서 과도기 대상(Transtional object)을 생각해본다. 아이가 생후 8, 9개월이 되면 촉감이 좋은 인형이나 이불 등 특정 물체나 대상에 애착을 가지게 되고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 심리적 안정과 위안을 주는 대상들을 과도기 대상이라고 하고 일종의 엄마 대신으로 분리불안을 줄여주기도 한다. 엄마에게서 건강한 독립을 위한 단계에 필요한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릴 때 좋아하던 장난감이나 이불, 옷 등을 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정도가 너무 심해 너덜해진 이불을 학교에도 가져가려고 하는 아이를 고민하는 부모님을 상담한 적이 있는데 그 아이에게 이불은 불안하고 외로운 때를 함께 이겨준 고마운 친구이자 엄마였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이불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연인 사이의 사랑을 맹세하는 반지나 목걸이 등, 추억이 담긴 다양한 물건들이 어른의 과도기대상이 될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준 정표는 단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캐릭터 역시도 그런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그림책에 나왔던 친숙한 모습들,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은 모험을 대리 경험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도 그러한 것들은 우리 마음에 안정과 위로를 주는 잠재된 무엇이기 때문에 그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아닐까.
귀엽고 포근한 인형이 유치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정당하다. 어른이 되어도 나에게 기쁨과 향수를 주는 캐릭터가 있다면 열렬히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박은진 인제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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