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제주도민의 '상처'가 아닌 혼란기 국가폭력에 의한 제노사이드
입법 행정 사법으로 완결돼 가던 진상 규명 일부 보수 집단 다시 시비
배상 없는 '진상규명' '명예회복' 수용한 유족의 상생정신 훼손 말길

영국 시인 엘리엇이 설마 우리를 예상하고 지은 것은 아니겠지만, 한반도의 4월은 왜 이리 잔인할까. 제주 4ㆍ3사건으로 2만 5,000명 내지 3만명, 4ㆍ19혁명 당시 이승만 경찰에 의해 200여명의 사망자와 6,000여명의 부상자가 났고, 지난해 세월호 참사로 300여명이 수장되었다.
노오란 유채꽃이 만발한 제주에 올해도 어김없이 4ㆍ3의 아픈 날이 왔다. 어느덧 67주년, 용케 살아남아 그때를 겪었던 이들은 이제 대부분 70, 80대 고령이거나 고인이 되었다. 아픈 트라우마는 고스란히 유족들과 제주도민의 몫이다.
지난 2월 제주4ㆍ3평화문학상 심사 뒷풀이 자리에서 고은 선생은 작품 중에 ‘상처’라는 용어가 많은데 부모형제가 학살당하고 온 마을이 잿더미가 된 ‘백조일손’의 비극을 손가락에 가시 찔리는 뜻의 ‘상처’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가라고 말하였다. 4ㆍ3은 제주도민의 ‘상처’가 아닌 혼란기 국가폭력에 의한 참사였다. 보스니아, 르완다, 코소보, 캄보디아 등에서 자행된 집단학살처럼 제주에서도 국가폭력에 의해 선량한 제주도민 수만 명이 학살되었다.
제주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고 있던 1948년 유엔이 제정한 ‘제노사이드(Genocideㆍ집단학살) 범죄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에서 제노사이드는 유엔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세계에서 단죄해야 하는 국제법상의 범죄임을 명시했다. 그런데 요즘 보수세력 일각에서 다시 4ㆍ3을 빨갱이 짓으로 몰고 희생자들을 재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기관에서 심사하고 대통령이 사과한, 그리고 정부가 국가추념일로 지정한 4ㆍ3사건을 뒤엎으려는 반역사적인 행위가 아닌가 싶다.
‘진상조사보고서’에서 밝혔듯이 4ㆍ3사건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봉기한 도민들의 자발적 거사였다. 소수의 남로당 제주지역 계열이 봉기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민의 절대다수는 통일정부 수립을 바라는 충정이었다. 여기에 분단정권 수립을 바라는 미군정과 군ㆍ경, 북한에서 내려와 ‘먹잇감’을 찾던 서북청년단의 폭력과 무차별 살상으로 도민들이 격앙하면서 무장하게 되고 사태가 확산되었다. ‘보고서’는 국내외 자료 어디에서도 북한이나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같은 것은 없었다고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계엄법을 제정하기도 전에 계엄령을 제주도에 선포하고 국무회의에서는 ‘강경진압’을 명령했다. 이로써 토벌대의 집단학살과 과잉진압이 자행되고 제주도민은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되는 참변을 당하게 되었다. 한국판 킬링필드였다.
긴 세월 분노와 통한을 삼키며 침묵의 돌하루방이 되었던 제주4ㆍ3은 김대중 정부에서 여야 합의로 4ㆍ3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1만 4,231명의 희생자를 선정하고 진상조사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현지에 내려가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4ㆍ3위원회는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새로운 자료와 증언이 나타나면 추가 심의를 거쳐 내용을 수정할 수 있도록 6개월의 시한을 두어 객관성과 공정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막상 이 기간에는 침묵하던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4ㆍ3위원회를 상대로 6건의 소송을 제기했고, 이는 대법원과 헌재에서 모두 패소 판결을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5년 동안 한번도 4ㆍ3추모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심의할 과제가 많았는데도 4ㆍ3위원회는 딱 한 번만 열었다.
국회가 특별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이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에 사과하고 대법원과 헌재가 이의제기 소송에 대해 모조리 패소 판결을 했으므로, 4ㆍ3사건은 입법, 행정, 사법적으로 어느 정도 완결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가 지난해 국가추념일로 지정할 만큼 마무리 과정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희생자 일부를 재심해야 한다면서 다시 불씨를 지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에 박 대통령이 제주도민의 아픔을 끝까지 보듬겠다는 대선공약을 지켜 추념식에 참석한다면 4ㆍ3의 마무리에 큰 기여가 될 것이다.

4ㆍ3위원회는 처음부터 심의 원칙으로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간부와 무장대 수괴급 그리고 군ㆍ경에 무력으로 저항한 사람 등은 희생자에서 제외했으며 군인, 경찰도 희생자로 인정했다. 어디까지나 특별법의 원칙에 따른 화해와 상생의 정신에서였다.
4ㆍ3위원회는 또한 그 동안 희생자로 결정한 사람 중에서 결격 사유가 밝혀지면 이를 취소하는 등의 조처를 취해왔다. 4ㆍ3사건은 지난 10여년 동안 기념관과 평화공원 건립, 4ㆍ3문학상과 평화상 제정 등을 통해 특별법의 정신대로 평화, 인권, 상생을 일구어 나가고 있다. 제주4ㆍ3은 해방 후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지만 여타의 과거사 처리와는 달리 희생자ㆍ유족에 대한 배상(보상)이 없는 그야말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기본이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화해ㆍ상생ㆍ인권ㆍ평화라는 특별법 정신을 유족과 제주도민들이 대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정치적ㆍ사법적 해결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있지만 미진한 사업도 적지 않다. 남은 과제라면 아픈 4ㆍ3사건의 사력(史歷)을 기억하고 이를 교훈으로 삼기 위해 정확한 기록을 통해 내일의 주인인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이다. 따라서 각종 정부기록과 교과서ㆍ참고서 등에 4ㆍ3사건의 진실을 수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유해 발굴, 아직도 묻혀 있는 해외 기록, 수형자와 연좌죄의 실태, 항쟁기간의 협동생활, 본토가 아닌 외딴 섬에서 단선ㆍ단정 반대 여론의 형성과정, 일본 오사카 지역 등에 피신한 제주도민의 실태, 4ㆍ3사건 이후 도민의 정신질환 실태 등을 조사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은 행정적이거나 학술 연구의 과정이지,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적대의식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특별법의 화해ㆍ상생ㆍ인권ㆍ평화의 정신에 따른 마무리 작업이어야 한다.
덧붙이자면 4ㆍ3사건은 미 군정기에 발생하면서 미 군사고문단 소속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진압을 지시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뒤늦게나마 사과해야 한다. 미국은 하와이 열도를 합병할 때 원주민 희생자들에 대해 100년 만에 사과하는 인도주의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모습을 제주에도 보였으면 싶다. 그리고 미국 정부기관에 보관된 4ㆍ3관련 미공개 자료가 있으면 4ㆍ3연구소 등 관련단체에 보내주었으면 한다.
4ㆍ3의 정명(正名)을 찾는 일을 더 늦춰서는 안 되겠다. 동학란→동학혁명, 3ㆍ1운동→3ㆍ1혁명, 4ㆍ19의거→4월혁명,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명을 찾아가듯이, 4ㆍ3도 ‘4ㆍ3민중항쟁’ 등 적합한 역사의 정명을 회복하면서 아픈 역사의 트라우마를 평화와 상생의 활력소로 이끌었으면 한다.
김삼웅 제주4ㆍ3사건진상규명위 중앙위원ㆍ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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