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족이 아는 사람들, 내 손주들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해달라”는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시간, 매일 새벽 2시. 8년이 흘렀다. 감기로 입원한 할머니가 딱 3일만에 벚꽃 흐드러지게 핀 길 따라 홀연히 가시고 나서. 그때 알았다. 가족을 잃은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단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저 단 한마디, 춥지도 덥지도 않아 좋은 때 “꽃 길 따라 가시니 다행”이라는 친구의 말에 의지해 몇 일, 아니 몇 년을 견뎌냈던 것 같다.
나는 개나리가 참 좋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학수고대하던 아이가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게 되어서도, 예쁜 옷과 구두를 아무 때나 살 수 있어 특별한 날이 빨리 오기를 손꼽지 않아도 될 만큼 커버린 지금도 한결같이 개나리를 기다린다. 차창 밖을 가득 메운 노란 색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설렘으로 가슴 두근대게 하니 그 짧은 순간 들뜬 마음으로 들어온 희망에 기대 몇 달을 또 버텨낼 수 있어 고맙기 때문이다.
친구가 세수도 하지 말고 잠옷차림으로 달려오라고 성화다. 잠에서 깨지 않은 몸을 일으켜 가보니 트렁크를 가득 채운 차에 태우고 시동을 건다. 서울에서 벗어나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그리고 가평에서 좀 더 들어가 어느 한적한 곳. “우리한테 지금 필요한 것은 쉬어가는 거야”라고 말하며 웃는 친구의 손에 들려 고기와 각종 야채 그리고 맥주에 소주까지 승용차 트렁크에서 캠핑카로 갈아탄다. 짐꾼 겸 요리사에 보호자로 따라왔던 남자 후배는 누나들 수다에 질려 진작 피신했고 차에 있던 옷과 담요를 몽땅 뒤집어쓰고도 봄밤 추위에 떨며 그녀와 나는 “가진 것 없지만 이제 시작인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며 꺼져가는 모닥불 옆에서 잔을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서양음식 좋아하던 할머니와 함께 종종 토스트와 보온병을 짊어지고 동네 산들을 헤집고 다녔는데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할 수 없었던 숲 속 캠핑이 수 십 년 만에 처음이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쉬는 진달래가 어슴푸레 남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온 후 잊었다. 잠시 돌린 한숨이 다음날을 지탱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개나리가 막 피기 시작했다. 싱숭생숭 마음만 흔들어 놓고 “자네 왔는가” 하며 반기려면 저만치 달아나고 없을 또 봄이다.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더니 역시 첫정이 무서운 것일까? 아니, 어쩌면 기다림이 너무 길어서일 수도 있겠다. 연이어 피는 진달래가 화사하기는 해도 개나리만큼 반갑지 않으니 흐드러진 노란색이 좀 더 오래 곁에 있어주면 좋으련만 그 놈의 급한 성격이 애달픈 줄을 모르고 순식간에 달아난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할머니의 김치부침개와 매일 현관에서 맞아주던 시큼한 감주는 아무리 그리워도 이제 먹을 수 없지만 개나리는 내년에 다시 오니 그래도 다행이라 해야 하나.
이맘때 비행기를 타는 대신 꽃 길 따라 가야 할 곳이 있는데, 새벽 2시. 난 오늘을 끝내지 못하고 짐을 꾸린다. 그런데 지난 달 귀국 후 던져두었던 트렁크를 열자 땀에 젖었던 옷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다시 여름으로 가는 길, 아침 비행기를 타려면 새벽에 나가야 하는데 옷을 빨아 말릴 틈이 없다. “할머니,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며 매일 기도하더니 내가 세상을 떠돌며 이렇게 살기 바랬어요?” 맞다. 아마도 내가 원하는 것이 할머니의 소원이었을 게다.
야속한 노인네는 절대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바람에 실려 훨훨 날아다니게 해달라고 했다. 돌아오면 당신 가겠다 했던 그 길 따라 매년 가던 길을 좀 늦게 가봐야겠다. 개나리 대신 벚꽃이라도 남아 눈물 씻어가고 웃는 얼굴 보이게 해달라 기도하며. 그리고 친구와 함께 도시락을 싸 들고 서울에서 벗어나 한참을 달려야겠다. 잠시 얼굴 보여준 개나리가 마음에 남겨준 희망으로 일 년을 또 그렇게 기다리며 의지해 버틸 수 있는 힘을 얻기 바라며.
김신아 아트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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