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꽃이고 농사는 농사
봄꽃이 만발이다. 작년 미친 듯이 한꺼번에 터지던 꽃들이 올해는 정신 차렸나 보다. 매화가 흐드러지더니 산수유가 슬그머니 뒤를 따른다. 며칠 전 비 오던 날, 아내와 훔쳐보듯 돌아본 남쪽 들녘은 충분히 젖은 덕분에 채도를 한껏 높여가며 진한 봄색을 뿜고 있었다. 10여 년 전, 이맘때만 되면 홀린 듯 새벽 길을 달려와 골짜기마다 후비며 색과 향에 취해 다니던 곳이다. 하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축제라는 이름으로 꽃보다 화려하게 나부끼는 플래카드와 고기 굽는 냄새가 심히 거슬렸다. 조용히 걷고 싶어도 크게 울리는 뽕짝 가락은 “내 나이가 어떠냐”고 따지며 내내 따라다녔고, 호객하는 손길은 말미잘 촉수처럼 시선과 몸을 훑었다. 도로가 막히는 건 기본이다.
아들놈이 엊그제 축제 개막행사에 아이돌 그룹이 온다며 친구들이랑 좀 태워다 달라고 부탁했다. 길이 막힐 텐데 꼭 가봐야겠냐고 했더니 반드시 봐야겠단다. “위 아래”를 외쳐대는 소화제 비슷한 이름의 애덜도 오는데 요즘 가장 ‘핫’한 걸 그룹이란다. 역시나 길은 주차장이었고 샛길로 간답시고 갔지만 행사장을 4km나 앞두고 내려줘야 했다. 듣자 하니 주변 시 군에서 애 어른 할 것 없이 걔네 본다고 꽤 몰려 왔다는 후문이다. 조금 있으면 벚꽃도 축제를 마련한다는데, 군 전체가 꽃 몸살을 앓는 중이다.
봄꽃 축제로 군 전체가 몸살
어쨌든 꽃은 꽃이고 농사는 농사다. 당장 감자를 심어야 하는데 작년보다 늦어졌다. 늘어진 몸에 경고장처럼 날아든 통풍에 시뻘겋게 부은 발은 사람을 앉은뱅이로 만들었다. 발도 못 딛는 통증도 괴롭지만 고기와 술을 끊었더니 먹어도 허기가 지는 금단현상까지 나타났다. 일주일정도 누워있는 사이 밀린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밭 두둑에 비닐을 씌우지 않아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게 심는 편이기는 하지만, 더 늦어지면 감자 수확하고 바로 심어야 할 메주콩까지 놓치게 된다. 밭을 갈기 전에 왕겨훈탄도 좀 더 만들어 뿌리고, 거름도 몇 포대는 넣어야 했다.
밭에서 이것 저것 정리하고 있자니 땀이 나기 시작한다. 아침에 분명히 오토바이 안장에 내려 앉은 서리를 닦아내고 나왔는데 몸은 벌써 후끈하다. 봄 가을은 눈에만 있고 내 몸엔 겨울하고 여름밖에 없나 보다. 수건이 없어 옷소매로 땀을 닦아내다 보니 이미 다 젖어있다. 이럴 땐 팔뚝이 짤막한 것도 억울하다. 주저앉은 채로 한숨 돌리는데 D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아픈 건 좀 괜찮으신가요? 통풍은 막걸리도 안되지라. 땀 좀 날 틴디 짠허네요. 하드라도 한 꼬챙이 사갈게라?" 동생이 잠시 후 아이스크림이랑 음료수를 사 들고 농장으로 왔다. 감 농사 준비하느라고 지 일도 바쁠 텐데 오자마자 장갑 꺼내 끼더니 퇴비 뿌리는 일을 도왔다. “옷에 얼룩 묻어. 놔둬. 이 정도는 내가 슬슬 해도 된단 말이다.” 동생은 대답도 안하고 삽질을 했다. ‘내가 누구한테 저런 사람이 된 적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놈이 혹시 전생에 내 피붙이였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아이스크림 음료수 사들고 와
퇴비 뿌리고 삽질하고 나선 휙~
일 마치고 농막에 자리잡고 앉아 하드 한 입 빨고 있는데 장씨 아저씨가 오셨다. “다리 아프다믄서.” 문을 열던 아저씨 시선이 내 입에 꽂혔다. 입에서 바로 하드를 빼서 아저씨께 내밀었다. “아저씨 이거 딱 한 입 빨았는데...” “언능 묵어!” 화 나신 것처럼 사양하시니 더 미안했다. “조금 절룩거리면서 그냥 움직이고 있어요.” 커피는 잡쉈다고 해서 현미차를 드렸다. 아저씨와 동생은 통풍에 좋은 나물 몇 가지를 얘기하고 주변에 수술까지 한 사람도 언급하며 걱정했다.
원샷한 찻잔을 내려놓던 아저씨가 동생에게 물었다. “자네는 장가 안 가는가?” 동생이 겸연쩍게 웃었다. “가고 싶다고 간당가요. 인연이 생겨야죠.” 아저씨 생각은 달랐다. “이년인지 저년인지 나서서 맹글어야지 기다린다고 생긴당가. 선 자리는 안 들어와?” 동생은 고개를 저었다. “뭐라도 있어야지라. 달랑 두 쪽 밖에 없는 놈한테 무슨 선이 들어온대요.” “자네는 그래도 나은 거여. 나 아는 사람은 그나마도 한 짝 밖에 없어. 그런데도 여기 저기 색시 내놓으라고 찌르고 다니는구마. 그렇게 애써야 뭐가 되능겨. 그래야 도와줄 마음도 생기는 거고.” 아저씨는 알고 있는 색시라도 검색하시는 양 한참 찡그리다가 벌떡 일어섰다. “벌써 가시게요?” 인사치레로 말씀 드렸더니 “나두 바쁜 몸이여” 나가신다. 그러더니 작은 소리로 “아프다구 해서 경운기로 거름이라도 올려줄까 싶어서 왔구마.” 하셨다.
"아프다구 해서 경운기로 거름이라도
올려줄까 싶어서 왔구마"
시골로 내려오기 전에는 ‘귀농하면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살아야지’ 생각했다. 먼저 내려간 사람들 중 몇몇의 얘기도 그랬다. 동네에 살게 되면 어르신들 간섭도 심하고, 심지어는 새벽에 불쑥 방문 열고 들어와 아직도 누워있냐고 호통을 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낫 한 자루 수저 한 짝까지 다 참견하고, 그러다가 어르신들 맘에 안 들면 험담을 하고 텃세를 부린다고 했다. “마을에서 한 이삼백 미터 떨어지고, 마을 방송 겨우 들리는 정도가 최고”라는 게 중론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원칙이었다. 너무 가까이 하지도 너무 멀리 하지도 말라는 거다.
정착할 곳을 구례로 정한 다음에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향에 가깝고 해 잘 드는 곳이면 좋겠다 싶었다. 물론 집안에서 바라다 보는 경치까지 좋으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말이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열심히 찾았고, 끝내 그런 곳은 없다는 걸 알았다. 남향의 양지바른 터는 이미 마을이 들어서 있거나 임자가 있었고, 경치가 좋은 곳은 험하거나 펜션이 들어 앉아 있었다. 좋아 보이는데 임자가 없거나 땅값이 싼 곳은 물이 솟는다거나 지반이 약하다거나 하는 이유가 있었다.
"마을에서 이삼백미터 떨어지고
마을방송 겨우 들리는 곳이 최고"
우리가 자리를 잡은 곳은 동향(東向)이라 노고단 쪽 전망은 좋지만 겨울이면 세시쯤 해가 떨어지는 마을이었다. 북사면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채워지지 않은 욕심은 한 구석에 그대로 있었다. 주민들과 어울리는 것도 걱정이었다. 촘촘히 붙은 마을 한 가운데 들어앉은 꼴이라 일 거수 일 투족이 어르신들 시야에 들어갈 텐데, 외모와 다르게 뼛속까지 도싯놈인 우리를 어떻게 봐 줄지 알 수 없었다. 대문을 잠그는 집이 없으니 우리만 꼭 닫고 살 수도 없고 마루 문도 추울 때 아니면 닫아걸지 않았다. 사생활을 보장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걱정은 기우였다. 어르신들은 지나가다 우리가 보이면 골목에 서신 채로 “정리 다 했수?” “천천히 시나브로 해요. 어차피 서두른다고 되는 일 아닝게” 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마당에 들어오신다 해도 “이 집이 부자가 살던 집이여. 잘 들어오신겨” 혹은 “젊은 사람들이 와 줘서 고마워요”라는 말씀이 대부분이었다. 특이하게 간전댁 할머니는 거의 말씀도 없고 눈도 안마주치면서 우리 마당을 정리해주셨다. “저희가 할게요. 그냥 놔두세요” 해도 “신경 쓰지 말고 이녁(자기) 일이나 하세요” 하면서 풀을 뜯거나 쓰레기를 정리하셨다. ‘저 할머니가 참견 좀 하겠는데’ 했지만 또 기우였다. 동네분들의 관심은 딱 마당까지였다.
어르신들이 집 안으로 불쑥 들어오시는 경우는 없었다. 대개의 경우 “밖에 계시지 말고 들어오세요”라는 말을 세 번쯤은 해야 신을 벗으셨다. 집에 들어선 다음에도 수저는 쳐다보질 않으셨다. 늦게 일어나기로 소문난 집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호박죽이며 떡이며 특별한 먹거리를 갖다 주실 때도 아주 천천히 소리 안 나게 마루문을 연 뒤 그릇을 살며시 놓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가셨다. 누가 두고 가셨는지 수소문하는 게 일이었다.
대신 농사짓는 일을 여쭤보면 다퉈가며 소리 높여 알려주셨다. 텃밭에 감자 심던 날은 비닐 안 씌운다는 항변도 소용없다. “농사를 글로 배워 쓰간디?” 어머니 몇 분이 오셔서는 씌우고 심고 손 털며 가셨다. 철 없는 것들이 농사짓겠다고 나서는 게 안쓰러웠는지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이라고는 “참 애쓰요” 혹은 이유도 없이 “고맙소” 하시는 게 전부였다. 참견? 간섭? 그런 건 없었다.
먹거리 갖다주실 때도 소리없이...
누가 두고 가셨는지 수소문할 정도
동갑내기 이장이 전화를 했다. “기술센터에서 트랙터 빌려서 가는 길인데 니네 감자밭 로타리 쳐 줄 테니까(갈아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며칠 전 비닐하우스 감자 캐는 일을 도와줬더니 지도 뭔가 해 줄 심산인가 보다. 밭갈이를 끝내고 아픈 발을 내려다 보며 “고랑 만드는 일은 할 수 있겠냐?” 묻기에 “그건 해야지. 트랙터 기름이라도 한 말 넣어주랴?” 되물었더니 “나중에 짬뽕이나 한 그릇 먹자” 하며 내빼버렸다.
고랑을 파려고 관리기(경운기처럼 생긴 경운기 보다 작은 기계)를 준비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간전댁 할머니다. “선재네 내일 감자 심는다면서요. 선재 즈그 어메한테는 아무 얘기 말고 내일 나랑 일찍 가게요.” 지난 주 몸이 편찮아서 힘드셨다는 얘길 들었는데 또 농장에 오시겠다는 말씀이었다. “할머니 안돼요. 제가 혼자 해도 반나절이면 하니까 걱정 말고 계세요. 집사람 알면 큰일나요.” 소용없었다. “선재아빠 몸도 안 좋다믄서요. 맘대로 해요. 아침 일찍 안 오면 나 혼자 깬죽깬죽 걸어갈 거인게.” 거리낌 없이 협박을 하신다. 감자 심는 것 말고도 마늘 밭 풀 뽑고 울타리 정리하고 그러실 게 뻔하다. “할머니 맘대로 하세요. 할머니 오시면 나 감자 안 심을래요!”
간전댁 할머니는 편찮으시면서도
감자 심는거 도와주신다네...
집에 가자마자 아내한테 일러바쳤다. 아내는 바로 전화를 집어 들었다. “함무니, 안돼!” 일단 내지르고 시작한 통화는 5분 넘게 이어졌다. 아내는 감자 심는 날을 다음날로 옮겼다고 말씀 드렸으니 그 전에 얼른 심어 놓자고 했다. 감자 심겠다고 한 날은 할머니 모시고 꽃구경이라도 가야겠단다. “귀경은 무슨 귀경이여. 할 일이 쌨는디” 하실 게 뻔하지만 구례에 살면서 길가에 핀 꽃 말고는 보신 적이 없다.
아내가 말했다. “할머니하고 나는 아무래도 전생에 연인이었나 봐. 슬프게 헤어져서 다음 생에 꼭 다시 보자고 했을 거야.”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하려다가 말았다. 대답이 뻔했다. ‘그래, 맞다. 나는 둘 사이 찢어 놓고 끝내 나라까지 팔아먹은 대역죄인이었을 거다!’
前 한국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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