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발동한 것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에 국가배상 청구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 피해자인 최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패소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을 질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은 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국민을 상대로 한 배상책임은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은 모순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앞서 2심 판결에서는 대통령의 국가긴급권 행사가 원칙적으로 정치적 책임만 지는 행위라고 해도 명백히 헌법에 위반된 경우에는 위법행위가 인정된다고 봤다. 이런 취지에서“위헌적인 긴급조치로 피해를 받은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일반의 상식으로 보면 2심의 판결이 설득력이 높아 보인다.
대법원의 판결은 정치적인 잘못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선례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대법원의 논리라면 정권이 위헌적인 조처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탄압하더라도 사후적으로 법적 책임을 묻지 못하고 국민의 피해도 구제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는 방향으로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더 우려되는 것은 최근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서 대법원이 시대를 거스르는 판결을 잇달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긴급조치가 당시로서는 유효한 법규였던 만큼 이를 따른 공무원의 직무행위가 곧바로 불법행위에 해당하는 건 아니다’는 판결을 내렸다. 수사기관이 긴급조치를 근거로 영장 없이 무고한 시민을 체포ㆍ구금했어도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법원이 앞서 2013년 “긴급조치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한 것으로 유신헌법은 물론 현행 헌법에도 위반돼 무효”라고 밝힌 취지에 비쳐보면 퇴행적인 판결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대법원은 지난 1월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당한 피해자라도 생활지원금 등 보상금을 받았다면 국가로부터 손해를 배상 받을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생활지원금은 불법 여부에 관계없이 지급되는 손실보상으로,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과는 성격이 다른데도 그런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형식논리에만 갇혀 일반 법 감정과 너무 동떨어진 판결을 거듭하고 있다는 지적을 겸허히 경청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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