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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작가남편론이 필요한 사회

입력
2015.03.2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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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화가 작가생활 계속 어려워

결혼 출산 육아로 단절 불가피

그림 마음에 품고 사는 게 중요

나의 결혼 조건은 소박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아무 제약 없이 평생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그 조건은 그 어떤 예물보다 나에게 소중했다. “외조를 잘 해주시나 봐요?” 결혼 후 남편이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그냥 가만히 있어주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야기를 들은 선배 교수는 정말 맞는 말이라고 무릎을 친다. 작품 활동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묵묵히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줄 알라는 뜻이다.

물론 남편은 가만히 있지만은 않는다. 종종 작품 운반과 디스플레이를 도와주고, 영감을 받을만한 다큐멘터리 방송을 찾아 틀어주기도 한다. 젊은 날엔 내가 너무 아름다운 것만 그리려 한다며, 폭넓은 경험의 세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온통 바퀴벌레 이야기인 ‘조의 아파트’를 비디오로 빌려와 나를 놀라게 하고, ‘링’과 같은 공포영화로 한밤중에 벌벌 떨게 했다.

친한 제자들 앞에서는 나의 무언의 힐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작가남편론’을 이야기했다. 작업에 웅크려진 어깨 펴주기부터 작품 운송과 디스플레이의 요령까지, 실속 있는 내용도 있지만 심오한 것만은 아니다. 아내의 전시장에 남자 손님이 오면 자리를 비켜준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스스로 대견해 하는 표정이다. 그 말끝에 제자들의 웃음이 빵 터지면 작가남편론은 끝도 없는 수다로 이어졌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낳는다고 말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생명을 바꾸는 일만큼 소중한 일이라고 외치지만, 여성 화가에게 작가로서의 삶이 존중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까지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뱃속 효녀였던 딸 덕분에 입덧 없이 만삭에 개인전을 하고, 친정어머니, 시어머니가 총출동한 덕분에 출산 두 달 후 예정된 전시도 마치는 등 가족의 도움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림 그리는 여자는 왜 이토록 주변의 도움을 필요로 할까? 남자 선배들은 씩씩하게 전시도 잘하고 발전을 거듭하는데 말이다.

예술의 세계를 말하면서 굳이 남녀의 차이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예술가로 성장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여성은 결혼, 출산, 육아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 크다. 임신에서부터 아이를 어린이 집에 보낼 정도가 되기까지는 최소한 3, 4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두 자녀를 갖는다면 10년의 세월이 훌쩍 가는데, 10년간의 휴지기 이후 다시 붓을 잡고 화단에 나서기는 쉽지 않다.

순수회화를 전공하는 미대는 여대가 된지 오래되었다. 그야말로 남학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매해 수많은 여학생들이 예비 작가로 양성되어 나오지만, 실제 화단에서 여성 화가들의 움직임은 기대보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내가 20대에는 여성 작가들의 생명이 짧다며 그림을 못 사겠다는 생각이 콜렉터들 사이에 존재하기도 했다. 독신이 아닌 여성 작가라면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공백이 있을 거라는 인식 탓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지속성이 중요하다. 꾸준히 생각하고 그 생각을 화폭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어찌 그림뿐이겠는가? 미술뿐 아닌 음악, 무용 등의 모든 예술분야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성 예술인이 가지게 되는 그 공백을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현명할까? 우리 사회가 이러한 고민을 같이 해 줄 수는 없는가 생각해 본다.

재능 있는 후배들이 육아문제로 작업을 힘들어 할 때마다 용기를 준다. 반드시 붓을 들고 있어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삶 자체가 공부니까 끊임없이 그림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언제든 그릴 수 있다고. 마음을 놓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힘들면 힘든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모든 과정은 어느 순간 예술성으로 표출될 것이니 삶을 능동적으로 포용하라고 말한다. 그 말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 것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숙명인가?

안진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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