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직장여성아파트 세입자 10여명
근로복지공단, 강제 퇴거 예고
2년 전에 계약기간 제한 도입한 탓
서울 구로구의 한 남성복 회사에서 ‘미싱 시다(보조)’로 일하는 김신영(47ㆍ가명)씨의 시계는 10년 전에 멈춰 선 것 같았다. 주 6일 하루 10시간30분씩 일해서 김씨가 받는 월급은 100만원이다. 그나마 2~3년 전 80만원이던 것이 오른 것이다. 저임금에도 그럭저럭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건 김씨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 근로자들을 위한 근로복지공단의 구로직장여성아파트에 살기 때문이다. 김씨는 보증금 3만원에 월세 4만원을 내며 10년째 이곳에 살고 있다.
하지만 2012년 공단이 계약기간을 2년(1차례 갱신해 최대 4년)으로 제한하면서 김씨는 방을 비워야 할 상황이다. 김씨가 이 곳에 정착할 당시엔 입주자가 원하면 계속 거주할 수 있었다. 공단은 “입주 대기자들이 많아 일부에게만 계속 혜택을 줄 수 없고, 그 동안 주거비를 아낀 만큼 자립할 기반을 만들어 놨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씨가 자립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월급 중 30만원을 시골 어머니에게 보내고 생활비와 보험료를 뺀 20만원을 저축했다. 저녁은 늘 컵라면으로 때우고, 겨울에도 보일러 한 번 돌리지 않았지만 모은 돈으로 보증금 2,000만~3,000만원에 월 40만~50만원씩 내야 하는 인근 원룸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아파트에서 4년 이상 살아 공단으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은 세입자 10여명 모두 김씨와 비슷한 처지다. 부모의 빚을 갚거나 회사의 임금 체불 등으로 돈을 모으지 못했다. 그러나 공단은 이들이 이달 29일까지 나가지 않으면 다음달 2일 강제로 짐을 뺄 예정이다.
근로복지공단은 1988년 여성 근로자 자립기반 마련을 위해 서울 구로, 경기 부천, 인천 등 전국 6곳에 직장여성아파트를 설립했다. 월 소득 120만원 이하의 저소득 여성들을 위해 보증금 3만원 월세 4만원(2011년 이전)을 받고 운영했으나 적자 규모가 커 2011년 매각하려다 세입자 반발 등으로 무산됐었다. 이후 계약기간은 2년으로 제한됐고, 세입자 소득기준은 월 210만원 이하로 완화됐으며 2인 1가구 거주 규정도 지난해 1인 1가구로 변경됐다.
세입자들은 이 같은 규정 변경이 아파트를 매각하기 위한 수순이라고 보고 있다. 구로여성직장아파트 자치회 대표 안모(37)씨는 “공단측이 생산직, 저소득자, 비정규직 등을 먼저 입주시키는 ‘우선 직종 선정 기준’을 갑자기 없앤 것은 비교적 소득이 높아 아파트를 매각해도 순순히 나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입주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대기자가 많다는 이유로 세입자를 내보내면서 정작 한 집에 1명씩만 살도록 규정을 바꾼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지난해 초 기획재정부가 직장여성아파트 사업과 관련된 근로복지진흥기금의 존치 여부에 대한 평가에서 “중기적으로 구조조정 해야 한다”고 지적하자 공단은 “중장기적으로 매각, 지자체 기부채납 등 사업종료 방안을 수립해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공단 측은 “아직 결정된 바 없으며 올해 연구용역을 통해 아파트 합리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제 퇴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공단과 세입자 간 타협점은 없어 보인다. 아파트 자치회 대표 안씨는 “공단 측에 우리가 3인 1가구로 살겠다고 제안했고, 안 되면 비슷한 조건의 거주지라도 구해달라고 했지만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공단 측은 “대출 등을 통해 다른 거주지를 구할 수 있게 안내했고, 복지는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가야 한다”고 맞섰다.
월 150만원을 받으며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고 있는 세입자 A(31)씨는 “원룸에 들어가 월 60만원의 월세와 공과금을 내면 평생 그 원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며 “그런 현실이 너무 암담하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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