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부 시위에 기름 부은 긴축재정, 작년 실업률 24%까지 치솟아
이달말 법안 통과되면 7월 시행, 규정도 모호해 공권력 악용 우려
"11월 총선 앞두고 정치적 술수" 시민 수천명 연일 법안 철회 촉구
스페인 정부가 시위대에게 벌금 폭탄을 쏟아 부으려 한다.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시위자에게 최대 6만 유로(약 7,2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시민안전법안’(the Citizen Safety Bill)을 제정하기로 것이다. 스페인 정부는 수년 간의 계속되는 고질적 폭력시위를 근절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스페인 언론과 시민들은 ‘입에 재갈을 물리는 법’(gag law)이라고 부르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집회 시위의 자유는 물론 언론의 자유까지 침해하는 악법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스페인 정부가 올해 11월 총선을 앞두고 반정부 시위대를 옥죄기 위한 정치적 술수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뉴욕타임스(NYT)는 “스페인에서 집회 시위의 자유와 공공질서 유지라는 정부 권한이 정면 충돌하고 있다”며 “폭력 시위 근절을 위한 전환점이 될지 아니면 반정부 시위가 격화하는 발화점이 될지 주목된다”고 보도했다.
스페인 정부, 시민안전법 제정
스페인 상원은 지난 12일 국회에서 시민안전법을 통과시켰다. 이달 말 하원에서도 통과되면 올해 7월부터 발효된다. 스페인 상원과 하원 모두 집권당인 국민당(PP)이 장악하고 있어서 법안 통과는 확실시 된다.
시민안전법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막대한 액수의 벌금을 부과해 집회 시위를 엄격히 통제하는 것이 골자다. 우선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집회가 진행되거나 허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시위대가 정해진 집회장소를 벗어나 행진하면 벌금 600유로(약 72만원)가 부과된다. 또한 국회나 스페인의 주요 공공건물 근처에서 집회를 진행해 ‘공공안전에 심대한 위협’을 끼쳤을 경우 벌금이 3만 유로(약 3,600만원)로 껑충 뛴다. 특히 원자력발전소나 통신국 기지, 버스 터미널 등 주요 사회기반 시설 근처에서 정부 허가 없이 시위를 벌이면 벌금 6만 유로(약 7,200만원)를 물어야 한다.
경찰들의 시위 진압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 무단 배포하거나 법원의 행정명령을 통한 공권력 집행을 시위대가 물리적으로 막아 설 경우에도 3만 유로의 벌금에 처한다.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할 때 경찰의 폭력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는 왜곡된 사진이 유포되면서 공권력에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는 게 스페인 정부의 설명이다. 또한 스페인 법원이 주택 철거를 명령해 적법하게 해당 절차를 진행하려 해도 거주자들이 몸싸움으로 저지하면서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이 빈발하고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복지축소로 폭력시위 증가
스페인 정부가 시민안전법 제정을 통해 시위 문화를 탈바꿈하려는 데는 수년 간 이어진 잦은 시위로 스페인의 국가 기능이 마비될 위기까지 처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부동산 거품이 급격히 꺼지면서 심각한 경제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4년 10월 기준으로 스페인 실업률은 24%를 기록했는데 유럽연합 평균 실업률보다 2배나 높은 수치다. 특히 25세 이하 젊은 층의 실업률은 53.8%까지 치솟았다. 여기에 스페인 정치인과 은행가, 노조 등에서 잇따라 부패 스캔들이 터져나오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현 정부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우파 정부인 국민당이 경제침체를 타개할 해법으로 건강보험과 연금 등 사회공적 자금은 삭감하는 반면 세금은 인상하는 방안을 골자로 한 긴축재정에 나설 뜻을 밝히면서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부은 상태다. 또한 현 정부가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제약하는 노동법까지 통과시키자 야권은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는 등 반정부 시위가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 건수는 2009년 이후 지금까지 350% 가까이 증가한 상태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스페인에서는 2012년 한 해 동안 총 4만5,000건의 시위가 발생했고, 2013년 수도 마드리드에서만 4,500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스페인 정부 관계자는 “스페인에서는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매일 두 시간에 한 건씩 시위를 여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시민안전법은 이러한 사회적인 혼돈 속에서 국민의 안전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영국 가디언에 말했다.
시민안전법, 집회 시위의 자유 침해 등 우려
하지만 스페인 언론과 시민들은 반정부 시위를 잠재우는 방법으로 법을 강화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현 정부가 시위대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수렴해 정국 안정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처벌에만 매달리며 시위대를 잠재적 범죄집단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안전법이 7월 본격 시행되면 집회 시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우선 시민안전법이 공공건물이나 주요 사회기반기설 근처에서의 시위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시민들의 권리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2011년 스페인 발렌시아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집회를 벌였던 국제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의 관계자는 “국회로 행진해 우리의 의견을 표현하거나, 원자력 발전소 근처로 가서 그곳이 위험하다고 피켓을 드는 것은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라면서 “집회가 폭력 시위로 변질돼 경찰이 개입한 경우는 2012년과 2013년의 경우 전체 시위 건수의 1%에 불과한데 정부가 과도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률가들은 시민안전법에서 시위대에 대한 처벌 기준을 ‘공공안전에 심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해놓은 것이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어서 공권력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즉 시위대가 허가된 장소에서 평화집회를 열더라도 현장에 있는 경찰이 자의적 판단을 통해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드리드에서 범죄 전문 변호사로 일하는 빅토르 선클은 워싱턴포스트(WP)에 “정부는 시위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벌금으로 시민들의 지갑을 털어서 집회에 참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며 “법적 제재는 모든 사회 문제 해결에서 가장 마지막 수단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들은 언론의 자유도 심각하게 침해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시민안전법은 시위 사진을 정부 허가 없이 배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사실상 사진 기자의 보도 자유를 제약했다는 주장이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한 관계자는 “시민안전법이 시행되면 언론들이 시위 사진을 보도할 경우 국민 알 권리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경찰 초상권을 침해하는 지 등에 매 순간 신중히 판단할 수밖에 없다”면서 “법적 처벌에 대한 우려는 언론에 자기 검열이라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말했다.
시민안전법, 사회적 약자의 삶을 더욱 피폐화
시민안전법 시행이 가장 우려되는 것은 하우스푸어와 성매매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호를 더욱 취약하게 한다는 데 있다. 스페인에서는 금융위기로 부동산 거품이 급격히 꺼지자 주택 대출자금을 갚지 못하는 하우스푸어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지난해에만 약 3만5,000 가구가 집에서 쫓겨나는 강제퇴거 명령을 법원에서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갈 곳이 없는 이들은 주택 지붕으로 올라가 퇴거 명령에 불복하면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는 화염병을 던지거나 몸싸움을 벌이며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스페인 언론은 현 정부가 불법 거주자들에게 어떠한 사회적 안전판도 제공해주지 않은 채 강제퇴거로 거리로 내몰아 이들의 격렬한 저항을 초래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시민안전법 시행으로 거주자들이 3만유로의 벌금까지 물게 될 경우 이들의 삶은 경제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리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스페인 주택담보대출 희생자 모임의 카를로스 마시아스는 “거주자들의 저항은 살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라면서 “시민안전법은 이들 전부를 범죄자로 둔갑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시민안전법은 성매매 여성들이 어린이들이 있는 학교나 거주지 근방에서 영업을 하다가 적발되면 3만유로의 벌금을 물도록 규정하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법 위반 이유로 막대한 금액의 벌금을 물리는 것은 이들을 사회에서 배제시키려는 가혹한 행위”라며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에서 정부 정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페인 전역에서는 현재 수천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정부의 시민안전법 제정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그들은 집회에서 푸른색 마스크로 입을 가리는 퍼포먼스로 이 법이 가져올 집회 시위의 자유 제약 등을 표현하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시민안전법이 올해 11월 열리는 총선을 앞두고 반 정부 시위를 옥죄기 위한 정부의 술책이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이 법에는 선거 전날 정치적 시위를 벌이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시민단체인 언론자유 수호 모임의 버지니아 페레즈 알론소는 “시민안전법은 과거 프랑코 총통의 파시스트 정부 이래로 시민의 기본 권리에 대한 최악의 공격”이라면서 “이 법이 총선을 통해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시민들의 거대한 바람을 결코 꺾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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