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동포 최헌기 회고전
30년 작품세계 한눈에
사회주의 사상가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동상이 각각 깃털펜, 만년필, 붓을 들었다. 이들이 공중에 흘려 쓴 의미를 알 수 없는 글귀들이 마구 뒤엉켜 붉은 빛의 구(球)를 만든다. 구의 표면에는 롤렉스ㆍ프라다ㆍ르노 등 명품 브랜드 상표 이미지가 붙어 있다. 사상가의 공허한 이상과 거대 자본을 향한 욕망이 뒤섞인 중국의 현실은 흐릿한 태양의 불빛처럼 어지럽다. 이들 가운데 반투명 허수아비만이 꼿꼿이 서서 붉은 심장에서 빛을 반짝인다. 설치미술작가 최헌기(53)의 자각상이다.
20일부터 서울 신문로2가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재중동포 2세 작가 최헌기의 대규모 회고전은 최헌기가 ‘경계인’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작품으로 시작한다. 태극기, 인공기, 오성홍기를 엉망으로 그린 다음, 그 위에 관객들이 서명을 하도록 한 그의 1994년작 ‘자화상’이다. “부모의 나라(한국)와도, 살아온 나라(중국)와도 구별돼 살았다”는 그의 고민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역설적으로 두 개의 이념을 제3의 눈으로 관찰하는 예술가가 됐다. 최헌기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사상도 자본주의의 욕망도 사람을 구원해주지 못한다. 믿을 것은 예술가 자신의 강한 자의식뿐이다.
평면작품 속의 모나리자, 오사마 빈 라덴, 자유의 여신상은 각각 서구적 아름다움과 폭력,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이 위를 반투명한 막으로 덮은 다음 초서체를 본뜬 의미 불명의 낙서 ‘광초(狂草)’로 다시 뒤덮었다. 플라스틱, 실리콘, 철사 등으로 표현한 광초는 캔버스에서 터져 나오거나, 거꾸로 치솟고, 폭포처럼 줄줄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상에 최헌기 자신만의 해석을 붙이지만 정작 관람객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저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상상하면서 고정된 사고방식을 스스로 뒤집게 된다.
최헌기는 전라북도 출신의 부모가 이주한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백두산 산자락에서 보냈다. 주로 베이징에서 활동하지만 2002년 광주비엔날레를 계기로 한국에도 연고를 얻었다. 2003년 이전까지 평면회화를 주로 그렸지만 그 이후로는 플라스틱 등으로 만든 글씨를 캔버스 밖으로 튀어나오게 한 입체화를 만들어 왔다.
이번 전시는 그가 2013년 중국 베이징 위엔디엔(元典)미술관에서 선보인 ‘광초 10년’전의 확장판으로, 그의 30년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광초 10년이란 2003년부터 2013년까지 해온 작업을 의미한다. 그 후 최헌기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최신작 ‘설국 2015’는 이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사상을 하얀 눈밭으로 뒤덮고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다는 의미로 읽힌다. 전시 5월 31일까지. (02)737-8643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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