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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물 들어 숲길 걸으니 양반가와 고운사가 눈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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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물 들어 숲길 걸으니 양반가와 고운사가 눈앞에

입력
2015.03.2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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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은 갈수록 깊어지고 들은 점점 옹색해 지는데, 노랗고 파란 봄빛은 더욱 진해진다. 화전리라는 이름은 당연히 꽃밭(花田)에서 왔으려니 했다. 경북 의성 사곡면 산수유마을 이야기다. 윗마을 화곡(禾谷)과 아랫마을 전풍(全豊)의 머리글자를 따서 화전(禾全)리가 되었다니 이곳 산수유마을은 딱히 꽃과는 상관없는 이름이다. 산수유 꽃 축제(27~29일)를 앞두고 있는 화전리의 사연 따라 의성 여행길에 나섰다.

의성 산수유마을에는 산수유는 300년 넘는 산수유가 3만 그루에 달한다./의성=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의성 산수유마을에는 산수유는 300년 넘는 산수유가 3만 그루에 달한다./의성=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현기증 나는 노란 물결 의성 산수유마을

화전2리는 머루와 다래가 숲을 이루었다고 ‘숲실’이라고 할 만큼 좁은 산자락 사이에 형성된 마을이다. 그런데도 한자로는 벼가 숲을 이룬다는 화곡(禾谷)으로 이름 지었다. 화전3리는 풍년이 계속된다고 전풍(全豊)이라 했단다. 그러고 보면 화전마을은 손바닥만한 논배미라도 지켜 풍년을 이루겠다는 산골 주민들의 절박함이 투영된 지명이다.

이 마을이 산수유로 이름을 떨치게 된 연유도 그 때문이다. 조선조 호조참의를 지낸 노덕래(盧德來) 옹이 1580년경 마을을 개척하면서 전답의 흙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산수유를 심은 게 시작이었다. 마을을 둘러보면 밭둑이며 개울 축대가 온통 돌무더기다. 산수유는 그 돌부리를 움켜쥐고 뿌리를 내렸다.

노란 산수유과 파란 마늘밭의 대조(3월 14일 모습)
노란 산수유과 파란 마늘밭의 대조(3월 14일 모습)
산정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산수유
산정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산수유
시간의 경계...빨간 열매와 노란 꽃
시간의 경계...빨간 열매와 노란 꽃

인근 금성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화산(死火山) 중의 하나다. 지각변동으로 켜켜이 쌓인 구들돌 모양의 돌무더기가 지금도 도로 곳곳에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쉽게 부서지는 돌이라고 이곳 주민들은 ‘석비렁이’라고 부르는데, 그 위에 흙을 얹어 밭을 만들었으니 비만 오면 유실될게 뻔했다. 산수유를 심은 것은 바로 자연유실을 막고, 약재로 쓰이는 열매도 얻을 요량으로 심은 지혜의 산물이다.

서울에도 양지바른 곳에는 산수유가 활짝 펴 별건가 싶지만 이곳 산수유는 격이 다르다. 수령이 무려 300년이 넘는 산수유가 사곡면 화전리와 춘삼면 효선리 일대에 3만여 그루나 된다. 새로 심은 묘목까지 합하면 10만 그루에 이른다.

축제는 올해로 8회를 맞지만 그 전까지 의성 산수유마을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바쁜 농사철로 접어드는 4월이면 “그저 꽃이 피나 했지 관광상품이 될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는 게 ‘산수유꽃축제 추진위원회’노해석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농사일에 바쁜 주민들에겐 이 그저 일상의 봄 풍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사진가 화가 블로거들의 입소문을 타고 알려진 것이 축제에까지 이르게 된 내력이다.

오래된 산수유 군락은 화전3리 입구부터 마을 맨 위 자락 화곡지까지 약 4km 구간에 분포하고 있다. 개울따라 밭둑따라 더러는 농로를 따라 이어진 산책길을 걷노라면 온몸에 노란 물이 들고 화사함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일손이 부족해 미처 털어내지 못한 빨간 열매와 노란 꽃이 아래위로 매달린 시간의 경계에선 절로 발길을 멈추게 된다.

봄 기운은 아래에서 위로 치닫기 마련이지만 이곳 산수유는 양지바른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꽃 축제를 하는 지역마다 때를 맞추지 못할까 안절부절 하는데 올해 의성산수유꽃축제는 시기를 제대로 맞췄다. 산수유는 꽃봉오리 하나에 20~30개의 작은 꽃대가 우산살처럼 펴지며 꽃을 피운다. 모든 꽃잎이 벌어져 구슬모양이 돼야 만개인 셈인데 올해는 축제기간에 절정을 이룰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꽃은 보름가량 핀다고 하니 색은 좀 바래겠지만 다음달 10일까지는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의성산수유마을 풍경의 절반은 마늘 밭이 만들어낸다. 노란 산수유와 파란 마늘 밭의 색감대비가 완벽한 봄 풍경을 그린다. 전국 마늘 생산량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의성은 마늘의 고장이다. 매년 10~11월 심은 마늘은 이맘때쯤 온 밭을 푸르게 물들이고 6월 하지 무렵 수확한다. 그리고 나면 바로 물을 대고 벼를 심는다. 일교차가 큰 내륙지역임에도 2모작을 해내는 바지런함이 산골의 봄 풍경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힘인 셈이다.

삼한시대로 가는 호기심 천국, 조문국박물관과 금성산고분군

아이들과 함께하는 봄나들이라면 금성면의 조문국박물관과 금성산고분군을 함께 둘러볼 만 하다. 산수유마을에서 약 12km 떨어져 있다. ‘조문국이 누구지?’ 박물관 관계자들도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조문국(召文國)은 사람이름이 아니고 삼한시대 진한의 12부족국가 중 하나다. 벌휴왕 2년(185)년에 신라에 편입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 박물관에는 인근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와 장식품, 매장 양식을 보여주는데 경주 지역과는 다른 특징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는 수준이다. 고대국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로 만족하면 되겠다.

삼한시대 진한의 부족국가인 조문국 고분이 몰려있는 금성산 고분군
삼한시대 진한의 부족국가인 조문국 고분이 몰려있는 금성산 고분군

이름도 생소한 조문국의 실체에 조금 더 다가서기에는 박물관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금성산고분군이 한결 낫다. 서쪽에서 보면 탁자처럼 위가 편편한 금성산 아래 40여기의 커다란 봉분이 올록볼록 호기심을 자극한다. 인근 탑리리와 학미리까지 합하면 200여기나 되는데, 경덕왕릉을 빼면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유지였기에 민가의 작은 묘도 봉분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사적지로 지정된 후 봉분을 더했고, 잔디를 입히고 관람 산책길을 만들었다. 경주 대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소풍 장소로는 손색이 없다. 곡선의 봉분과 금성산의 조화가 아름다워 지역에서는 결혼사진 촬영장소로도 인기를 끄는 곳이다.

이곳에서 5km 가량 떨어진 산운리에는 450년 역사의 영천 이씨 집성촌 산운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금성산을 기준으로 고분군은 서쪽, 산운마을은 남쪽이다. 규모는 전통마을의 운치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소박하다. 1800년대에 지은 운곡당과 소우당은 개방돼 있어 조선시대 양반가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다. 소우당은 한국관광공사에서 명품고택으로 지정해 숙박업도 겸하고 있다. 마을입구의 산운생태공원은 나들이 길에 쉬어가기 적당하다. 폐교를 생태전시관과 마을전시관으로 단장했고, 건물 뒤편은 놀이공원으로 꾸몄다.

최치원의 흔적 묻어나는 고운사와 사촌마을

의성에서 손꼽히는 또 하나의 전통마을은 점곡면 사촌마을이다. 600여년 전 안동 김씨가 먼저 자리잡았고, 250여년 전에는 풍산 류씨가 들어와 두 양반가의 자존심이 묻어나는 마을이다. 퇴계의 제자인 김사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만취당(晩翠堂)이 안동 김씨의 자존심인 양 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데, 최근에는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곳으로 더 알려지면서 안동 김씨 가문을 자극하고 있다. 류성룡의 모친 역시 안동 김씨 김광수의 5번째 딸로서, 사돈간이라고 볼 수 있는 두 집안의 묘한 경쟁의식이 깔려 있다. 최치원의 장인 나천업이 살았다고도 하니 마을의 역사는 12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촌마을 가로숲은 600년 명품 숲.
사촌마을 가로숲은 600년 명품 숲.

마을 자체는 시대변천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집들이 곳곳에 들어서 옛모습을 많이 잃은 편이다. 외형으로만 보면 이곳의 자랑거리는 전통가옥이 아니라 마을 서편 개천을 따라 형성된 ‘사촌리가로숲’(천연기념물 405호)이다. 마을의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해 조성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방풍림이자 경관림이다.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팽나무를 주종으로 400~600년 된 거목들이 하천 양쪽으로 폭 30m, 길이 1,050m나 이어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숲이나 생태에 관심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소풍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대도시에 있었으면 명품중의 명품 숲이었겠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의성군 관광안내책자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고 있다.

인근에 함께 볼 만 한 곳으로 조계종 제16본사 고운사(孤雲寺)가 있다. 사촌마을에서 10여km 떨어져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운사는 최치원 선생과 관련이 많다. 원래는 높을 고(高)자를 썼는데 유교?불교?도교에 통달한 최치원의 호를 따서 孤雲寺로 바꾸게 되었다. 천왕문을 지나 잇달아 만나는 가운루와 우화루는 최치원이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일부에서는 여지여사(如知如事)는 스님 이름이 아니라 ‘앎과 같이 행하라’는 유불선의 가르침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의 등운산 아래 고운사.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의 등운산 아래 고운사.
고운사 연수전의 단청
고운사 연수전의 단청

고운사에서 첫째로 꼭 봐야 할 것은 우화루 건물에 걸린 ‘孤雲寺’ 라는 현판이다. 반듯하게 잘 썼구나 하며 지나치다가도, 19세기에 이수철이라는 10세 어린이라 쓴 것이라면 다시 보게 된다. 특히 필체를 아는 사람들은 외로울 고(孤)자가 힘이 넘치고 멋지다고 평가한단다. 열살 짜리 아이의 글씨라고 하기엔 원숙미가 느껴진다.

경내에서 유일하게 담장을 두른 건축물이 있는데 바로 연수전(延壽殿)이다. 영조의 어첩 (御帖)을 보관했던 곳이라는데 1904년에 그린 단청이 닳고닳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연수전을 보는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좌우와 뒷면 나무 벽에 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그림과 글이 있는데 나무 결 따라 희미하게 자국이 남아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재미가 있다. 특히 뒷면에는 단청 장인이 흥에 겨워 작업을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한 발을 들고 있는 학이 장인의 기분처럼 생동감 넘치고 장난스럽다. 천년 고찰에서 꼭 봐야 할 목록에 유교 건축물이 꼽히는 것도 아이러니다.

주지스님의 처소인 고운대암 앞의 노주석(석등)도 눈 여겨 볼 대상이다. 원통기둥 앞 뒤로 쥐 두 마리가 양각되어 있다. 낮에 활동하는 흰쥐는 불을 끄고 내려오고, 밤에 활동하는 검은 쥐는 불을 켜기 위해 올라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런 모양의 석등은 전국에서도 이곳밖에 없다.

고운사에서 꼭 봐야 할 마지막 풍경은 만덕당에서 대웅전 뒤로 펼쳐지는 산세다. 사찰이 자랑하는 부용반개(芙蓉半開, 부용연꽃이 반쯤 핀)형상의 명당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거대한 무덤 같기도 하고 젖가슴처럼 부드럽기도 한 등운산(騰雲山)의 곡선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사찰 앞에까지 차로 갈 수도 있지만 입구에서 약 10분 정도는 걷기를 추천한다. 사시사철 솔 향기 짙은 숲길이 일품이다. 고운사는 오래된 사찰로는 드물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의성=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여행메모]

●의성은 서울에서 갈 경우에는 중앙고속도로 남안동IC, 대구에서는 의성IC를 이용하는 것이 빠르다. ●사곡면 산수유마을은 곳곳에 주차장을 확보했지만 축제기간에는 태부족일 수 밖에 없다. 화전3리 마을회관 부근에 차를 세우고 안내를 받는 게 현명하다. 윗마을 숲실로 무작정 차를 몰다가는 좁은 농로에 갇혀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산수유마을에서 금성산 고분군으로 가는 길에 ‘제오리 공룡발자국화석’도 볼 수 있다. 도로 바로 옆 경사면에 있어 접근성은 편리하지만 주차공간이 부족하고 관람대가 따로 없는 점이 아쉽다. ●마늘의 고장답게 의성에는 마늘을 주제로 한 먹거리가 많다. 의성IC에서 가까운 봉양면소재지에는 ‘의성마늘소 먹거리타운’이 형성돼 있고 의성읍내에는 마늘요리 전문식당 ‘마늘이야기’(054-832-6362)가 유명하다. ‘마당깊은집’(054-834-8003)은 코다리찜 요리를 잘하는 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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