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D 공장서 과도한 업무로 질환
신장이식 등 번 돈 모두 치료비로
업무상 질병 인정은 '바늘 구멍'
아픈 몸 이끌고 단기계약직 전전
복직율 37%
“전 일 하는 걸 좋아하고 열심히 할 의지도 있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네요.”
지난달 충남 천안시에서 만난 이선우(30ㆍ가명)씨는 169㎝의 큰 키에도 몸무게는 40㎏을 갓 넘길 정도로 말랐다. 직장 생활하는 동안 말기신부전을 앓게 되면서 간단한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꿈 많은 아가씨였던 이씨는 매달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산업재해보험 보상이나 회사의 보상을 바라긴 어려운 상황이다.
아파서 일도 못하는데 생계는…
이씨는 2003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LCD 공장에서 생산된 모니터 액정에 하자가 없는지 검사하는 작업과 이를 기록하는 전산 작업을 동시에 처리했다. 원래 2명이 나눠서 하는 일이지만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혼자 일해야 했다. 이씨는 “화장실도 못 가고 쉬는 시간도 없고 항상 기계 옆에 붙어 있었다”고 했다. 편두통, 생리불순, 방광염 등의 증상이 생겼지만 공장 직원 대부분이 겪는 일이라 참고 넘기다가 4년 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씨가 4년 간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은 8년에 걸친 투병생활을 하며 병원비로 다 들어갔다. 2009년엔 투석치료를 버틸 수 없을 만큼 몸 상태가 악화돼 아버지로부터 신장이식을 받았다.
문제는 이후에도 이씨의 몸이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는 점이다. 퇴사 후 집 근처 마트에서 물건 정리하는 일을 하다가 3일만에 응급실에 실려갔고, 공장에 취직했지만 근무 10일 만에 쓰러져 한 달을 앓아 누워야 했다. 이렇다 보니 이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무 업무 뿐이지만 그마저도 단기계약직 밖에 구할 수 없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가야 하는 이씨를 고용주들이 꺼려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못하니 몇 달 바짝 일해서 번 돈으로 1년 생계를 꾸려야 한다. 올해는 지난해 지방선거 때 선거관련 업체에서 6개월 간 일해 모은 돈으로 버티는 중이다. 목돈이 들어가는 병원비를 미리 마련하는 건 꿈꾸기도 어렵다. 기초생활수급 신청도 했었지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여동생이 있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병간호를 한 동생은 언니의 투병생활을 보며 자신도 일을 하다 병을 얻게 될까 심하게 두려워하는 상황이 됐다. 이씨는 “일하다 응급실에 가게 되면 병원비가 더 들어가니, 부모님조차 웬만하면 일을 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씨가 처음 말기신부전 판정을 받았을 때 회사에서는 보상 차원에서 병원비를 지원해주겠다고 했었지만 휴직 후엔 없는 말이 됐다. 이씨가 받은 지원금은 신장기능 장애인으로 인정돼 정부에서 받은 장애연금이 전부다.
멀고 먼 산재 인정의 길
이씨의 사례처럼 임금노동자들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병을 얻게 되면 수입이 끊겨 삶이 더 팍팍해진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산업재해보상보험이지만 이씨처럼 질병을 얻게 된 경우 산재 인정을 받기가 매우 어렵다.
이씨는 반도체ㆍ전자산업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산재인정과 보상을 돕고 있는 시민단체 ‘반올림’을 통해 집단 산재 신청을 했지만 결과를 낙관하지는 못한다. 우리나라는 업무상 질병에 대한 산재 인정률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산재 신청 10만901건 중 90.1%가 승인 됐지만,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에서의 승인율은 45.1%(9,056건 중 4,088건)에 불과했다. 판정위가 심의한 뇌심혈관질환 2,088건 중 471건(22.6%)만 인정됐고, 근골격계질병은 5,742건 중 3,106건(54.1%)이 인정됐다.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의 승인율도 낮지만 심의 대상에 오르는 것도 어렵다. 산재법 상 업무상 질병 목록에 해당하는 질병이어야 하고, 이 질환이 업무로 인해 발병했다는 것도 의학적 자문을 통해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씨의 산재신청을 돕고 있는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의학적 자문 결과 말기신부전증 발병이 업무 중 노출된 화학물질들과의 연관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의는커녕 심의 전 역학조사도 시작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산재 인정 절차가 지나치게 까다롭다고 지적한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국장은 “노동자들은 어떤 병의 발병 위험성이 있는지, 산재 신청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포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며 “질병은 사고와 다르게 위험요인이 누적돼 발병하는 건데 대부분의 사업주가 위험도 측정이나 자료 보관을 하지 않고, 입증 책임도 노동자에게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업무상 질병에 대해 산재를 신청하는 경우 소요 기간은 평균 1년6개월에서 2년6개월에 달한다. 긴 산재 신청 기간 동안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근로자 중 일부는 몸이 아픈 상황에서도 다시 작업장을 찾기도 한다. 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2010년6월 만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은 김모(당시 38세)씨는 생계 때문에 확진 후에도 작업장에 나갔다. 결국 2011년9월 산재로 인정받았지만 김씨는 4개월 전인 그 해 5월 사망했다
.
산재인정을 받더라도 복직하는 노동자는 40% 미만이다. 지난해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공개한 ‘산재보험패널 기초실태 분석결과’에 따르면 산재 사고ㆍ질병 후 원 직장에 복귀한 노동자는 37.1%(3만624명)에 불과했다. 34.7%(2만8,652명)는 다른 직장에 재취업했으며 5,532명(6.7%)은 실직자가 됐다. 이선우씨 역시 병가 6개월 후 복직이 아닌 퇴직을 해야만 했다.
박찬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산업안전 문제에 대한 합의가 높은 사회일수록 산재인정률이 높게 나타날 수 있는데, 우리는 발병 건수 자체를 낮춰야 한다는 인식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는 사회복지사들에게 특히 많이 발생하는 허리질환 등을 산재로 인정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회복지사협회 차원에서 민간상해보험에 가입하도록 하고 있어 사회적 인식이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천안=글ㆍ사진 양진하기자 realh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