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다당제·시장경제 허용
서민 위한 환율정책이 밀수꾼 돈벌이로
4분기 총선, 정치·경제 분수령
최근 인터넷에서 ‘베네수엘라’를 검색어로 관련 뉴스를 찾아보면, ▦미국과의 외교분쟁 ▦경제난 악화 ▦반정부시위 격화와 같은 내용들이 주로 검색된다. 특히 이달 5일 우고 차베스 전대통령 사망 2주기가 지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때 중남미의 보석으로 불렸던 베네수엘라에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수출의 95%, 석유산업의 그늘
베네수엘라는 반미의 대표적인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1998년 차베스가 집권하기 이전에는 석유를 매개로 미국과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중남미의 대표적인 친미국가였다. 미국은 석유메이저업체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석유개발이권에 깊숙이 개입했고, 베네수엘라는 국영석유공사의 자회사인 CITGO를 미국에 설립해 세계 최대의 석유소비시장인 미국에서 생산부터 판매까지 완결된 비즈니스모델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석유산업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축복인 동시에 저주라고 불린다. 경제의 대부분이 고수익을 보장해주는 석유산업에 집중되면서, 다른 기반산업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기형적인 구조로 바뀌어 세계 최고의 물가수준을 기록했고, 석유개발에서 소외된 빈곤층은 갈수록 증가해 1999년에는 국민의 50%가 소득이 최저생계비 미만인 빈곤층으로 분류되었다. 커피, 코코아 등 천연의 경쟁력을 갖췄던 농업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21세기 사회주의’의 도전과 시장의 대응
반정부 쿠데타 핵심인사이자 야당지도자였던 차베스의 1998년 대선 승리와 1999년 국민투표를 통한 사회주의 혁명은 당시에는 뿌리깊은 사회부조리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차베스 대통령은 1999년 사회주의 헌법으로 개헌하면서 ‘21세기 사회주의’란 용어를 썼다. 러시아나 동구권의 20세기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실패했지만 베네수엘라의 경우에는 극도의 자본주의와 경제 양극화를 경험했기 때문에 토대 자체가 다르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 때문에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는 다당제와 시장경제를 허용하는 독특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차베스의 사회주의는 공공부문에 대한 지원을 통해 부패한 민간시장을 자연스럽게 정부 주도의 공공시장으로 개편하기를 원했다. 2006년 이후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공기업의 시장지배를 시도했고, 강력한 외환통제를 통해 민간분야의 외화유출을 차단하여 국부의 축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정부 기대와 다르게 돌아갔다. 정부가 사들인 공장들은 신규투자가 중단되면서 효율성이 크게 떨어져, 평균 산업가동률이 40%를 넘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관세절감을 위해 송장금액을 낮추지만, 베네수엘라에서는 외환을 빼돌리기 위해 송장금액을 높이고 차액을 리베이트로 돌려받는 게 일반적이다. 정부 프로젝트일수록 리베이트 비율은 더 높아진다. 외화유출이 오히려 더 심각해진 것이다.
마두로 집권 이후 외환사정 악화
차베스 사후 2년 동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국제석유유가의 고공행진으로 정부 재정수입이이 늘어나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시중에 달러화 공급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때문인지 부패에 따른 외화유출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정부가 정한 범위를 넘는 송금이나 외환배정 우선순위에서 밀린 수입의 경우에는 암시장을 통해서 달러를 구해야 하는 데, 정부에서 달러를 풀지 않으니 암시장 환율은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암시장 환율이 올라 물가가 상승하자 정부 공식환율로 수입된 제품들의 판매가격도 따라서 올랐다.
2013년 물가상승률이 기존 20%대에서 56%로 폭등하자, 정부는 물가억제를 위해 ‘공정가격법’을 제정, 공식환율로 수입된 제품의 판매가격 단속과 함께 유통업체의 이익을 원가의 30% 이하로 제한했다. 시장은 더욱 차갑게 반응했다. 치솟는 환율과 물가 때문에 판매할수록 적자가 나는 상황에서 가격마저 마음대로 올릴 수 없게 되자 제조업체들은 생산을 지연시켰고, 유통업체들은 재고를 빼돌렸으며, 소비자들은 물품부족을 우려해 사재기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복지를 위한 정부의 각종 보조금과 지원금은 규모가 커지고 있다. 휘발유, 전기, 통신요금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베네수엘라의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우리 돈으로 17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 1인당 석유사용량은 주변 국가의 4배에 달한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자신이 소비하기 위해 구입하는 것이 아니다. 국경지대에 국내 휘발유를 사서 국경 너머로 가져다 파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석유 밀매매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도 카라카스에서는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대신 서주는 직업도 등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구입한 물건의 일부도 시세차익을 노려 인근 국가로 밀수출된다. 최근 더욱 심각해진 옥수수가루, 우유, 설탕, 치약, 샴푸, 의약품 등의 생필품 품귀현상도 정부 공식환율로 수입된 값싼 제품이 밀수출로 빼돌려진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서민복지를 위한 정부의 환율정책이 밀수꾼들의 돈벌이 수단이 되면서, 시장에서 싼 가격의 제품을 찾아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간혹 물건이 나오더라도 이를 사서 되팔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빈곤층의 비율은 2013년 30% 수준으로 낮아지고, 소득이 최저식료품비에도 못 미치는 극빈층의 비율은 2007년 이후 한 자릿수로 낮아졌다. 정부의 서민복지정책이 성과를 내고는 있지만, 복지정책을 위해 현지 볼리바르화를 마구 찍어내다 보니 암시장환율은 계속 오르고 있다. 물가상승으로 화폐가치가 하락할 것을 염려해 이를 달러로 바꾸려는 수요가 계속 증가했기 때문이다. 올해 3월 암시장 환율은 정부의 공식환율인 달러당 6.3볼리바르보다 40배나 높은 250볼리바르까지 치솟았다.
유가하락은 경제위기의 결정타
유가하락으로 인해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더욱 악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매년 100억달러 이상의 외채를 상환해야 하지만, 석유가 대부분인 수출의 경우 유가하락으로 인해 2015년에 500억달러 이상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국가부도위기설도 나오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유가하락에 대한 책임을 미국에 돌리고 있다. 셰일유전의 개발로 석유생산이 증가한 미국이 국제유가의 하락을 부추기고, 다른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의 생산감축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가 무상에 가까운 가격에 석유를 공급하며 그토록 공을 들였던 카리브 석유협정과 중남미 볼리바르동맹도 와해될 처지에 놓여 있다. 사회주의 형제국가로 동맹을 자처했던 쿠바마저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선 상황이다.
정부는 경제위기의 원인을 좌파 정권의 몰락을 원하는 미국과 우파의 흔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우파는 좌파정권의 퍼주기식 서민지원정책과 중남미 좌파의 수장이 되고자 주변 국가에 저가로 석유를 제공하는 선심정책으로 나라경제가 파탄에 이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향후 전망과 회생가능성
지금의 경제난은 정부의 사회주의 경제정책과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 여기에 유가하락까지 겹치면서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공식환율제도를 폐지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서민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너무 커서 정부도 고민만 하는 판국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유가하락으로 인해 정부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이 더 이상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재정수지 개선을 위해서는 정부의 공공부문 수입에 대한 고정환율제도 폐지와 휘발유가격 인상 같은 재정수입 확대와 복지지출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기존의 환율과 가격통제정책의 폐지는 곧 서민경제의 파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국민적 합의를 통해 휘발유가격을 소폭 인상하고, 생필품에 대한 고정환율제도는 그대로 유지한 채 부분적 시장환율제도를 도입해 재정적자를 만회하면서 서민복지정책도 계속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재정적자폭이 더욱 커지면 조만간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정부 주도든 시장 주도든 큰 변화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생필품난이 심화될 경우 올해 4분기에 예정된 총선을 통해 정치적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두로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는 2013년 말 지방선거 당시를 제외하곤 지속적으로 하락해, 취임 초기 50% 대에서 지난 달에는 23.3%까지 떨어졌다. 야당이 다수당이 될 경우,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중간선거가 내년에 치러질 가능성도 높다.
기존의 경제정책이 뒤바뀔 경우 베네수엘라 경제가 겪게 될 충격은 매우 클 것이다. 환율이 급등하면 물가가 폭등하고 가처분소득이 줄면서 단기적으로는 지금보다 더한 경기침체가 올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견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베네수엘라의 잠재력이다. 현금수입이 보장되는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 철, 알루미늄과 같은 자원이 있고,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과 같은 기초산업과 자동차 등 제조업 기반도 갖추고 있다. 대부분의 제조업이 국유화 이후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지만 정부정책만 잘 받쳐준다면 회복은 시간문제이며, 외환정책에 따라서는 수출산업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자원의 부가가치를 늘리고 노후화된 설비를 현대화하는 투자가 필요하다. 최근 우리 기업이 대규모 정유플랜트와 천연가스 처리플랜트를 수주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의 투자환경이 매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환경이 바뀐 후에도 우리 기업이 참여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금과 같이 어려운 위기가 우리 기업이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지엽 KOTRA 카라카스무역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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