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대신 돈 급한 서민을 대출통장 모집책으로 이용
싼 이자 미끼로 대출 빙자 사기, 한 달 새 54명 검거…피해액 24억
김모(36ㆍ여)씨는 지난해 10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자 먹고 살 일이 막막해졌다. 그러던 중 내연남 최모(35)씨로부터 “대포통장을 모집해 중국에 있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보내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 중국 총책으로부터 1,000만원을 받아 서울 노원구의 아파트를 사무실로 꾸민 김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인 친언니까지 포섭해 대포통장 모집책으로 활동했다.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대부업체인데, 대출을 해줄 테니 통장을 보내달라”고 속이는 식이었다. 이런 수법으로 자매는 지난해 11월부터 올 2월까지 총 132개의 통장을 공급해 3,000여만원을 챙겼다.
보이스피싱 수법이 지능화, 고도화하면서 생활이 어려운 서민들이 범죄조직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있다. 보이스피싱 사기단은 경기 불황이 지속되자 전세금이 급한 대출자나 취업준비생, 지적장애인 등 경제적으로 곤궁한 이들을 집중 공략해 인출책 등 하부 조직원으로 활용하는 추세다.
최근 두드러진 피해 유형은 김씨 자매처럼 피해금 인출을 위해 필수적인 대포통장 모집책으로 동원되는 것이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이모(70)씨는 지난 6일 결혼을 앞둔 아들의 전세금 마련을 고민하다 사기단이 만들어 준 통장으로 들어온 1억6,900만원을 빼내 넘겼다. 이씨는 열흘 후에야 자신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인출책으로 이용된 사실을 알았다. 19일 경찰에 구속된 지적장애 3급 박모(53)씨도 검찰수사관을 사칭한 사기단에게 속아 7,700만원을 건넨 A(31ㆍ여)씨의 피해금 인출 통로로 자신의 통장이 사용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경우다.
요새 보이스피싱 조직의 주요 공략법은 대출을 빙자한 사기다. 지난해 8월 중국 옌타이(烟台)에 콜센터를 차린 보이스피싱 총책 이모(32)씨는 ‘저금리로 대출 받으실 분’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무작위로 뿌려 123명으로부터 10억원을 가로챘다. 경찰 관계자는 22일 “보이스피싱이 처음 시작된 2006년 직후에는 가족 납치를 내세운 고액 사기가 많았는데, 지금은 저금리 대출을 미끼로 접근해 서민들을 상대로 소액을 빼 가는 방식이 판 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11일부터 이달 16일까지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의 집중 단속 결과, 검거된 보이스피싱 조직원은 54명, 피해액은 24억3,000여만원이나 됐다.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젊은층이 보이스피싱에 적극 뛰어드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조선족이 주를 이룬 과거와 달리 현재는 20,30대가 현금 인출책 ‘알바’로 범죄에 가담하는 경우가 늘었다. 이모(27ㆍ여)씨는 구직사이트에서 ‘인터넷게임 이용자의 돈을 인출해 자신의 계좌로 입금하면 환전회사가 건당 1만5,000원의 수당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봤다. 이씨는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인터넷뱅킹 아이디, 비밀번호, 보안카드를 넘겨 준 후 1억6,000여만원의 피해금을 자신의 통장에서 빼내 사기단에 전달했다가 덜미를 잡혔다. 거꾸로 사기단을 등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오모(22)씨는 자신을 감시하던 조선족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폭행해 피해금 2,000만원을 빼앗아 달아났다가 22일 경찰에 구속됐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보이스피싱 사기단은 최근 불경기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심리적 빈틈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며 “피해자들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홍보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채지선기자 letmekno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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