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감 = 행복감 그릇된 세태
경제 성장에도 분배 불공평
조롱ㆍ비하하는 관성 고착화
차이 인정하는 가치 체계를
부당한 횡포에 함께 연대해야
# 상대방이 나를 얕잡아 보는 것 같다. 뭐라고 딱 집어낼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한 건 아니다. 눈동자가 굴러가는 속도와 방향, 얼굴 잔 근육들의 미세한 움직임, 부정확한 발음과 말 끝을 길게 늘리는 말투…. 이 사소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무거운 공기에 괜히 어깨가 쪼그라들고 자꾸 눈치가 보인다. 한 마디로, 기분이 나쁘다.
마트에서 ‘진상고객’이 점원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붓는 것만이 모욕이 아니다. 표정이나 말투를 통한 무시와 경멸, 비하, 조롱, 차별 등이 사실은 더 넓고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누구나 한 번쯤은 타인으로부터 불쾌한 모멸감을 느껴봤을 것이고, 반대로 누군가에게 모욕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방식은 다양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더라도 말투와 눈빛 등으로 교묘하게 상대를 모욕할 수 있다. 때문에 모멸감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물리적인 폭력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고 지극히 주관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사회적 감정 ‘모멸’
하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가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분위기에 젖어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감정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며 “우리사회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멸시하고 조롱하는 심성이 관성으로 고착화 된 것은 아닐까”라며 그 위험성을 지적했다.
우리 안에 자리잡은 ‘모멸’이라는 감정 덩어리는 급속한 경제성장에도 결실이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한 기형적인 사회에서 자라났다. 불안한 생존기반에서 비롯된 결핍과 공허를 타인의 인정으로 채우고 싶은 욕구가 크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너그러움이 부족해지면서 우리는 결국 누군가를 모욕하고 경멸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산물인 모멸감은 우리 일상과 사회ㆍ문화에 직결돼 있어 개인의 자존감 회복, 너그러운 사회분위기 조성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구조적인 노력이 수반돼야 극복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노동 시장 등 삶의 기반 안정이 우선
우리사회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헝그리 사회’에서 벗어났으나 사람들이 증오 에너지를 분출하는 ‘앵그리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책 ‘정치와 삶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권력과 부, 지위만 쫓는 이유에 대해 “한국 사회가 오만과 모멸의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남을 깎아내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는 사회 분위기를 바꾸려면 인간 존엄의 근본 토대가 되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의식주가 풍족해졌지만 그것을 얻는 방법은 빈궁한 시대 보다 더 가혹해졌다”며 “삶의 기반이 빈약해 사람들이 늘 불안해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지난 수십년간 가장 높은 성장률을 이룬 국가 중 하나지만 개개인의 삶은 오히려 팍팍해졌다. 근로자 4명 중 1명이 저임금 근로자(25.1%ㆍ2012년 기준)이며, 임금불평등은 OECD 회원국 중 세 번째로 높다.
오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하청회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도 큰 돈은 못 벌더라도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하는 데 현실은 너무도 열악하다”며 “노동시장의 불평등부터 해소해야 사회의 가치체계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비교 대신 있는 그대로의 존중 필요
모멸은 주로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향한다. 학력 경제력 외모 나이 집안환경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분류하는 습성에 대해 김우창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 습관이 마음 속 깊이 박혀있다. 차이를 인정하는 가치체계를 확립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타인과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등급을 매기고, 남보다 앞서야 안심하며 ‘우월감=행복감’이라고 느끼는 우리의 내면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타인을 향한 모멸과 모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모멸감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 응원 카페가 생긴 것은 사람들도 언젠가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공감과 함께 뭉치면 재벌에도 맞설 힘이 생긴다는 연대감 때문이다. 김찬호 교수는 “갑을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되고 ‘땅콩 회항’ 사건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 것은 새로운 변화이고, 앞으로 부당한 횡포가 견제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모멸감에 대한 감수성부터 키우자고 했다. 인권감수성 장애감수성이라는 말이 사회적 인식을 바꾼 것처럼, 상대가 모멸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하는 ‘모욕 감수성’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김찬호 교수는 “며칠 전 외부 강의를 갔을 때 딸 또래의 대학생이 강의 준비를 도왔지만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며 “돌이켜보니 그 학생을 나와 같은 인격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런 부분부터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고 고백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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