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 중시하는 유교문화... 유독 업신여김 못 참아
그럼에도 폭언ㆍ무시ㆍ억압 아무 거리낌 없이
땅콩 회항ㆍ아파트 경비원 분신 최근 떠들썩
개인 인격 파괴ㆍ자살ㆍ범죄 등 '모멸' 폭발성 커
#“(조현아 전 부사장이) 모멸감으로 (나를) 죽였다” -‘땅콩 회항’ 결심 공판서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
#“평소 사모님이 5층에서 떡이나 과자를 개한테 주듯 화단으로 던지며 먹으라는 등 모멸감을 줬다”-분신한 압구정 아파트 경비원 이모씨의 동료들
#“(성적 대상으로 이용한 데 대한)모멸감 때문에…” - 이병헌 협박 결심 공판서 모델 이지연
대한항공 땅콩 회항, 압구정동 아파트 분신 경비원, 영화배우 이병헌 협박 등 최근 우리 사회를 들끓게 했던 사건들에는 공통 코드가 있다. 피해자나 가해자가 그 배경으로 표현했던 ‘모멸감’이다. 그게 무엇이길래 극도의 분노에 이은 보복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의 기폭제가 된 것일까. ‘업신여김과 깔봄을 당하여 느끼는 수치스러운 느낌’이라는 사전적 뜻은 그 폭발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모멸이라는 감정으로 우리 사회를 분석한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유교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체면을 중시하며 살아 온 한국인들은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유독 참지 못한다고 말한다. 모멸감에 민감한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변했다. 엄격한 반상(班常)구분의 신분사회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면서 과거보다 더 쉽게 모멸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분석이다.
땅콩 회항사건이나 화물운전기사를 상대로 ‘맷값 폭행’ 사건을 일으킨 SK가의 최철원 전 M&M 사장 사례는 돈과 권력을 동일시 한 단적인 행태다. 주식투자에 실패해 아내와 딸 둘을 목 졸라 살해한 40대 실직 가장도 수치라는 외피를 띄고 있지만 일부 재벌의 삐뚤어진 사고와 다를 게 없다. 진 빚을 다 갚고도 수중에 몇억원이 남는 상황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한 데 대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내가 죽고 나면 남은 가족들이 멸시를 받을 것 같아 함께 죽으려 했다”는 게 경찰에 한 진술이다. “몇 년 간 버틸 수는 있겠지만 손 벌리고 아쉬운, 시쳇말로 쪽 팔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모욕적 언행은 단순히 돈을 매개로 한 ‘갑을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 바이러스처럼 번져 있다. 사회적 병리 현상이 됐다. 온 국민이 눈물로 지샌 세월호 침몰사건 다음날 정모(29)씨는 단원고 교사와 학생이 집단 성관계를 가졌다는 허위 글을 일간베스트저장소 사이트에 올려 유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그는 20일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몇 년 전 한 대학에서 여학생이 나이든 청소부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모욕한 사건이나 치킨 배달원에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음식물 쓰레기봉지를 버려달라고 했다는 진상 주부 등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감 능력의 부재를 드러내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더구나 사회 지도층이라 할만한 국회의원이나 판사마저 증인, 피고인에 대한 막말과 하대로 여론의 도마에 수시로 오르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막말은 사실 판사 개개인의 의식 수준에 관한 문제”라고 했지만, 뿌리 박힌 판사들의 ‘권위 의식’이 아니고는 막말 법정을 설명하기 어렵다. 위, 아래 가릴 것 없이 모멸감을 부추기는 사회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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