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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 무풍지대서 반미운동 첫 불꽃… "리퍼트 습격은 광기일 뿐"

입력
2015.03.2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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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 조정' 김현장씨

전두환 광주학살 묵인한 美에 반대

정치적 절박성 탓 방화

반미운동 전국적 확산 계기로

양국, 서로에 대한 인식 바뀌어

부산근대역사관, 해방되자 미군 24사단이 차지

1999년 가까스로 한국 반환

4년뒤 근대역사관으로 탈바꿈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바뀐 옛 부산 미문화원 앞에 방화를 주도했던 김현장씨가 서 있다. 이 사건은 친미주의가 공고했던 한국에서 반미운동을 촉발시킨 단초였다. 부산=전혜원기자 iamjhw@hk.co.kr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바뀐 옛 부산 미문화원 앞에 방화를 주도했던 김현장씨가 서 있다. 이 사건은 친미주의가 공고했던 한국에서 반미운동을 촉발시킨 단초였다. 부산=전혜원기자 iamjhw@hk.co.kr

“그건 반미가 아니라 광기야. 모든 걸 미국 탓으로 돌리는 거지. 그런 단체들과 어울려서 반정부 구호 외치고 집회했던 사람들, 정신 차려야 해요. 이런 게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5일 진보성향 단체인 우리마당독도지킴이 대표 김기종씨로부터 피습을 당한 것을 보며 김현장(65)씨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33년 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두 사건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무척 다르다. 전화기 너머 김현장씨가 말했다. “당시는 독재 정권의 억압과 언론의 외면 속에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정치적 절박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방화를 택한 거지 사람을 해칠 뜻은 전혀 없었어요. 이젠 합법적인 방식으로 얼마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데 왜 그런 방식으로 의사표출을 하는지 몰라.”

공교롭게 미 대사 피습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 김현장씨와 부산 미문화원이 있던 부산근대역사관을 찾았다. 그로선 십 수년 만의 방문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꽃샘추위에 코트 깃을 꼭 여미며 그가 말했다. “그날도 오늘처럼 맑고 쌀쌀했어. 부산에 와도 여긴 올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오니 감회가 새롭네. 옛날 기억도 나고.”

3시간을 달려 도착한 부산근대역사관 앞에서 김씨는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찾은 부산 중구 대청동 거리, 억센 전라도 사투리로 “이 짝(쪽)이 도서관이었제”라며 역사관 왼편을 가리켰다. 2층이 직원들 숙소였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마침 서울에서 온 듯한 젊은 관광객이 국제시장이 어디 있는지 묻자 그는 마치 대청동에 살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길을 안내했다.

평일 오후여서인지 역사관 안은 한산했다. 20대로 보이는 남성 관객 한 명만 전시물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역사관에서 일하는 직원은 “관람객의 연령대는 다양한데 주말에는 가족 단위로 많이 찾는다”며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그 사건에 대해 다들 알고 이 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도 젊은 사람들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잘 몰랐다. 건물 앞을 지나는 행인들 중 40대 이상은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렸지만 20, 30대 중에선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었다. 20대의 한 남성은 “어렸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들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1999년까지 미국 소유 건물이었던 부산근대역사관에서 33년 전인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전두환 군부정권을 사이에 두고 운동권과 미국이 충돌을 시작한 곳이다.

김씨는 방화사건에 직접 가담하진 않았지만 배후 조정 혐의로 체포됐다. “미국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의 학살을 묵인한 미국에 반대한 것이었어요. 그걸 알리려면 유인물로는 안 되고 불이라도 질러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어요. 하지만 인명피해를 입히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사전답사도 하고 사람이 가장 적을 때를 택했지. 사람이 죽을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어. 그게 가장 마음이 아파요. 평생 가슴에 죄로 남아 있지. 일생을 속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해.”

방화사건의 총지휘는 당시 고신대 신학생이었던 문부식씨가 맡았다. 스물셋의 청춘이었던 그는 1981년 가을 김씨를 만나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게 됐고 전두환 정권의 실상과 미국의 묵인 하에 이뤄진 학살의 진상을 알리겠다고 마음 먹었다. 준비는 치밀했다. 휘발유를 사서 플라스틱 통에 나눠 담는 팀, 이를 문화원까지 운반해 현관에다 쏟는 역할을 맡은 팀, 문화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고 휘발유에 점화하는 팀으로 역할을 나눴다. 방화 직후에는 충무동 국도극장 3층과 미문화원 인근 백화점 4층에서 유인물을 뿌릴 계획이었다. 문씨는 총지휘와 함께 현장을 촬영하기로 했다.

이들의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됐지만 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동아대 학생 1명이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단순 방화에 유인물 살포가 목표였으나 피해자가 생기면서 일이 커졌다. 사상자가 나오자 문씨도 자신의 결정에 회의가 들었다. 그는 먼 훗날 인터뷰에서 “살인의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하고 세 사람이 다치게 한 방화치사상죄를 범한 사람”이라며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을까,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나 고민했다”고 말했다.

문씨가 먼저 자수하고 김씨도 자수 형식으로 체포됐다. 김씨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천주교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도 체포됐다. 김씨와 문씨는 사형은 선고받았지만 1988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김씨는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고 했다. “광주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는 걸 보고 났더니 죽음에 익숙해져 있었어요. 사면될 것이라곤 기대도 안 했지. 천주교가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었을 거야.”

김현장씨가 부산근대역사관 내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설명한 패널 앞에서 "인명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사전답사까지 여러 번 했는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부산=전혜원기자
김현장씨가 부산근대역사관 내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설명한 패널 앞에서 "인명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사전답사까지 여러 번 했는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부산=전혜원기자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파장은 컸다. 정권은 사건을 주도한 이들을 정신이상자나 북한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로 몰고 가는 한편 주동 인물들을 보호한 천주교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범죄 혐의자라 해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는 방어적 자세를 취했던 천주교도 정부의 탄압과 언론의 왜곡보도에 태도를 바꿨다.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에 대한 미국의 용인, 주한미군사령관 위컴과 주한 미 대사 워커의 한국민 비하 발언 등이 이 사건의 배경이라면서 반미운동을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위컴 사령관은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추종하니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 게 알려져 분노를 샀다. 문제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권은 서둘러 천주교와의 갈등을 봉합했다.

미국 대사관, 주한미군, 미문화원 등 미국 관련 시설물에 대한 공격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80년 12월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이었다. 광주에서의 학살을 미군이 묵인한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반미감정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사건을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은폐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광주 사태를 은폐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깨뜨리고 반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공과 친미는 헌법 이상의 국민적 합의’라고 쓴 한 신문의 대담한 사설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친미는 당위였다. 하지만 이후 운동권의 시각은 달라졌다. 일부 미국 언론도 미군이 전두환 정권을 지지한 것을 비판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이 중요하게 인식되는 건 한국과 미국이 서로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이 더 이상 순진하게 미국을 우방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됐다는 사실에 레이건 정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지원하면서 종속적인 한미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광주 문제가 지역적 한계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도 일조했다. 이듬해 대구 미문화원 정문 앞 폭발사건이 일어났고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있었다. 20여년 이상 이어진 반미운동의 첫 불꽃이 바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었던 셈이다.

부산근대역사관 건물은 오랫동안 외세의 한국 지배에 대한 상징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건물 뒤에 있는 용두산공원만 넘으면 바로 바다로 이어지는 자갈치시장과 여객터미널이 나온다. 자갈치시장이 있는 남포동이나 광복동, 중앙동, 대교동 일대는 20세기 초만 해도 바다와 자갈밭이었으나 매립 후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구시가지로 밀렸지만 상권이 해운대로 옮겨가기 전까지 부산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이 지역은 한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일제가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해 얻은 이익을 이곳을 오가던 배들이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일본의 나가사키항에서 부산항까지 증기선으로 15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미군이 이 건물을 덥석 집어삼켰다. 미군이 주둔하며 24사단 숙소로 사용하다 1949년 미문화원으로 쓰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미대사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부산 미문화원은 방화사건 후에도 여러차례 학생운동의 공격 대상이 됐다. 1985년엔 부산대생 투석사건이 있었고 1986년엔 부산대생 점거기도사건이 있었다. 미국은 결국 방화사건이 일어난 지 14년 만인 1996년 미문화원을 폐쇄하고 2층의 영사관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문화원과 영사관을 폐쇄한 뒤에도 미국은 3년간 이 건물을 비워둔 채 방치했다. 부산시와 시민단체는 반환을 거듭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다가 1999년 4월 70년 만에 한국에 반환했다. 근대역사관이 문을 연 건 그로부터 4년 뒤인 2003년 7월이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역사관은 이 사건을 이렇게 기술한다. “이 사건은 반미의 무풍지대로 인식되었던 남한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미국은 물론 온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다.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 내 일부의 반미 감정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인용되고 있으나, 방화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점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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