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법원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시위에 참여했던 주민들과 활동가들 60명에게 잇달아 벌금형을 선고했다. 주민들은 “부당한 사법처리에 불복종하겠으니 벌금 대신 노역형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했다. 기막힌 세상이다. 괴물 같은 송전탑으로 평생 살아온 삶의 터전을 망쳐놓고, 그것에 저항했다고 벌금형이라니….
밀양의 할머니들은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고 맞섰다. 그런데 70여년 전 영국의 어떤 동화에서는 산동네 할머니들이 줄넘기로 자본의 횡포에 맞선다. 엘리너 파전이 1937년에 쓴 ‘줄넘기 요정’은 한 할머니와 주민들이 자연과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영주를 막아내는 이야기이다. 환상적인 스토리와 가끔은 냉소적인 유머, 인간을 향한 따뜻한 애정과 앙금처럼 남는 기이한 슬픔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샬럿 보크가 2000년에 은은한 수채화를 얹어 그림책으로 만들어냈다.
사탕을 구경도 못할 만큼 가난한 글라인드 마을 소녀들에겐 줄넘기가 낙이다. 일곱 살 줄넘기 신동인 엘시 피더크를 케번산의 줄넘기 요정들이 수제자로 삼는다. 엘시는 초승달이 뜬 밤마다 케번산에서 ‘요정 줄넘기 신공’을 모조리 배우고, 손잡이가 사탕으로 된 요정 줄넘기를 받는다. 거미줄 위에서도 줄을 넘고 줄을 넘으며 달도 넘게 된 엘시는 마을의 자랑이 되지만, 몸이 자라 요정 줄넘기를 쓸 수 없게 되자 ‘요정 신공’은 사라진다. 늙고 여전히 가난한 엘시는 상자에 넣어둔 요정 줄넘기를 가끔 꺼내 손잡이를 빨아먹는다. 엘시의 줄넘기 전설을 모두가 잊었어도, 소녀들의 케번산 초승달맞이 줄넘기는 마을의 풍습으로 남았다.
새로 온 영주가 케번산에 공장을 세우겠다고 하면서 마을이 뒤집힌다. 엘시는 마지막 초승달맞이 줄넘기를 제안한다. 마을 사람들은 영주에게 “릴레이 줄넘기가 끝나면 첫 벽돌을 놓겠다”는 증서를 받아낸다. 마을의 모든 여자들은 줄넘기를 시작하지만, 마지막 주자인 예순여섯 할머니의 발에 줄이 걸린 순간 영주는 벽돌을 집어든다. 그 때 너무 늙어서 아이처럼 작아진 엘시가 나타나 요정 줄넘기로 이틀 동안 줄을 넘는다. 초조해진 영주가 첫 벽돌을 놓자 엘시는 ‘힘껏 넘기’ 신공으로 벽돌과 함께 땅 속 깊이 사라진다. 악에 받친 영주가 그 뒤를 따라 뛰어들고 엘시는 ‘높이 뛰기’ 신공으로 땅 위로 올라온다. 영주는 영원히 올라오지 못한다.
케번산의 비장한 릴레이 줄넘기 장면을 읽고 있으면 밀양의 할머니들이 생각난다. “언제까지 버티겠냐”는 영주의 비웃음 속에서 소녀, 아줌마, 할머니들은 한 사람씩 줄에 발이 걸릴 때마다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는다. 투사로 그려진 밀양 할머니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억울하고 조마조마하다. 어릴 때부터 초승달맞이 줄넘기를 하며 자라온 글라인드의 할머니들처럼, 밀양의 할머니들도 자신들의 삶이 깃든 마을을 소중히 여기는 평범한 우리 이웃이다.
밀양에서와 달리 케번산에는 줄넘기 요정들이 있었다. 인간들이 조금은 더 착했던 시절에는 요정들이 인간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진짜로 그랬을까? 요정이 인간을 도와주던 시절은 인간의 역사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전설과 옛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버린 현실에 상처받은 민초들이 스스로 붙인 반창고다.
영주가 마법처럼 사라진 것이 ‘줄넘기 요정’의 결말은 아니다. 영주는 사라졌어도 영주와 마을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엘시는 끝없이 줄을 넘는다. 요정도 없고 전설도 사라진 시대, 그래도 “끝까지 싸우면 후회는 없다”는 밀양의 할머니들이 자랑스럽다.
김소연기자 au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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