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중독 부모와 학대당한 자매, 평생 사랑 부정당한 옆집 게이 노인
세 사람 독백 1인칭 서술 교차되며, 메아리처럼 소용돌이치는 여운 남아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한 일”이라고 일찍이 1930년대 조선의 모더니스트 이상이 썼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소설가 리사 오도넬의 첫 장편소설 ‘벌들의 죽음’은 말로는 할 수 없어 오로지 행동으로만 보여줘야 했던 어떤 결단들이 비밀의 연쇄 고리를 이루며, 동방의 이 오랜 문장이 여전히 유효한 진리명제임을 입증한다. 고딕풍의 스산함과 을씨년스러움이 짙게 깔린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배경으로 극빈층의 어린 자매가 맞닥뜨리게 되는 생의 절벽은 참혹하지만, 그 결연한 비밀의 힘으로 소녀들은 힘겨우나 경탄할 만한 탄력 회복성을 보여준다. 시나리오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작가가 2013년 발표한 이 스릴러 소설은 영연방 국가에서 발표된 소설 중 최고의 데뷔작에 주어지는 커먼웰스 문학상을 받았다.
마약과 알코올에 취해 사는 부모 때문에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은 적 없는 10대 소녀 마니와 넬리는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어느 겨울날, 침대 위에서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와 집착과 학대의 애증관계에 놓여있던 어머니는 이 돌연한 죽음 앞에서 두 자매의 눈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형언하기 힘든 슬픔과 절망의 태도를 보인다. 아버지가 사춘기를 맞은 두 딸을 성적으로 유린해왔음을 알면서도 묵인했던 어머니가 저토록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니. 카디건조차 걸치지 않은 채 산책 좀 하겠다고 나간 어머니는 곧 창고에 목을 매 죽은 채로 발견되고, 끔찍했던 양육시설에서의 경험이 반복될까 두려운 자매는 서로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라고 의심하면서도 부모의 시체를 집 앞 마당에 몰래 매립한다.
이 모습을 소녀들의 옆집에 사는 70대의 고독한 게이 노인 레니가 본다. 40년간 함께 산 애인이 죽는 순간까지 커밍아웃을 두려워해 친구 사이로 위장하며 살아오다 몇 년 전 혼자가 된 중산층 노인이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 안락사한 애인은 레니에게 면회도 허락하지 않고 유언장에조차 그를 언급하지 않았다. 전 생애에 걸친 사랑을 부정당한 그는 그러나 여전히 연인을 그리워하며 여생을 쓸쓸히 보내고 있다. 슬픔과 자포자기 속에 10대 남창의 유혹에 넘어가 성매매 범죄자로 신원이 공개된 처지지만, 그는 소녀들을 돕고 싶다고 느낀다.
서사는 무책임한 부모와 극빈으로 인해 유년시절을 잡아 먹혀 버린 두 자매와 고독사의 운명에 놓인 성소수자 노인 사이의 우정을 중심으로 ‘가족의 재구성’이라는 결말을 향해 전개되는 듯 보인다. 시험지를 보면 정답이 그냥 보이는 타고난 공부 머리 덕분에 A플러스의 성적을 놓치지 않지만 마약과 낙태 등으로 점철된 문란한 삶을 살고 있는 반항아 마니와 어리숙하고 맹해 보이지만 바이올린에 천재적 재능을 가진 기품 있는 소녀 넬리 사이의 갈등은 유사부모로서의 레니의 역할이 강화될수록 증폭되는 양상을 띠지만, 자매의 관계가 사건 이전부터 모녀로 기능해왔다는 점에서 도리어 애틋하다. 어렸던 엄마가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던 엄마의 역할을 강렬한 거부와 저항의 몸짓 속에서도 언니는 묵묵히 해낸다. 성폭행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다고 서로가 서로를 단정하면서도 단 한번도 묻거나 아는 체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설은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누군지 드러나면서 한 번, 소녀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한 레니가 자매를 위해 말없는 희생을 감행하면서 또 한 번, 뭉클하고도 소름 끼치는 반전을 보여준다. 누구도 이 비밀들을 발설하지 않았으나, 자매는 순식간에 그 의미를 알아챈다.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이제까지의 비참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지극한 사랑이었음을 침묵 속에서 이심전심 깨달으며 소녀들은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스릴러의 형식을 본격문학의 문법 안에서 낭비 없이, 매끄럽게 풀어낸 이 작품은 팔딱거리는 캐릭터들만으로도 인상적이다. 두 자매의 독백과 레니가 죽은 애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1인칭 서술이 교차ㆍ반복되는 소설은 비밀의 공간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세 사람의 메아리처럼 귓전에 여운을 남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 비밀이 있으므로 그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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