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폐쇄회로(CC)TV 설치 의무화 법안을 두고 사회가 민감하다. CCTV 의무화 대국민 서명운동까지 하고 있고 국회 본회의로 넘어간 영유아보육법과 아동학대 근절 특위를 비롯한 여러 민간 단체들도 기동력을 보태 법안상정까지 간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상정된 개정안 법안은 부결됐다. 보육교사의 인권침해를 둘러싼 반대입장과 선거를 염두에 둔 지역구 의원들의 어린이집 원장들 눈치보기가 실제 작용한 결과라고 한다.
인천어린이집과 대구어린이집 폭행사건의 동영상이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흘러 다닐 때 나는 일부러 화면을 외면하곤 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면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아이가 폭력에 노출되는 것에 겁부터 난다. 운이 없다면 내 아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고, 구조적으로 안전망이 뚫린 사회에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겁도 나고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기사로만 사건을 보았을 뿐 동영상확인은 주저하는 편이다. 아동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담담해지고 싶거나,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건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폭력의 내용물 앞에서 거칠게 분노하는 주위의 반응에서 물러나 있고 싶었다. 악플공화국 시민들이 댓글로 행하는 폭력의 수위는 사건과 문제의식과는 무관한 수위로 금방 도달한다. 심각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폭력을 감상하는 태도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밑바닥에 있던 감정은 거칠게 엎질러지곤 한다.
이것을 CCTV의 저인망이었던 어린이집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부패지수가 이미 최고조에 다다른 한국사회는 구조가 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만연화 되어있다.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라고 단언할 수 없는 시스템에서 피해의식과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대중들은 사건이 터지면 자신의 아픔과 상처에 급하게 대입한다. 대안과 소통보다는 감추어둔 분노게이지를 유통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돌아보면 문제를 은폐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부패한 정부의 설계엔 반드시 희생제가 필요하고 그곳은 언제나 윗자리보다는 낮은 곳에 마련되어 있다. 상처는 다시 부메랑이 되어 대중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마녀사냥과 희생제, 꼬리 자르기를 위해서 CCTV의 사각지대를 점검하고 전 도시를 감시 화각 안에서 가꾼다고 해서 폭력이 사라질 리 없다. 분노 앞에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상처받은 아이들이 똑같은 어린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악몽이다.
어린이들은 약자이며 보호대상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CCTV 의무화가 시작된다면 점점 사회 곳곳으로 CCTV 내시경이 파고들 것이다. 영유아의 기본권이 교사보다 기본권의 위계에 앞선다는 법적고견은 동의와 참혹이 공존한다. 인간의 기본권에도 위계가 존재한다는 법적 효력 앞에서 쓸쓸해진다. 여기서 우리가 어린이집 CCTV 의무화에 합의한다면 앞으로 어린이집 교사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말 그대로 잠재적 범죄자들로 규정하는 것에 사회가 합의하자는 것이다. 인성이 검증되지 못한 채 파견된 몇몇 어린이집 교사들의 파행으로 인해 훌륭한 어린이집 교사들의 직업적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건강한 교사들마저 온종일 화각 안에서 극심한 피로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그들이 받을 스트레스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클 수도 있다.
감시하고 감시 받는 사회에 평온이 있을 수 없다. 머지않아 사회엔 누가 감시하고 누가 감시대상이냐의 이분법만 남게 될 것이다. 어느 쪽에 서게 되더라도 우리는 괴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건강한 어린이집 교사들을(내 아이의 어린이집을 포함한)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은 사회의 역린을 자청하는 일인가?
김경주 시인ㆍ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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