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그리웠소. 김일성은 오늘밤 분해서 편히 못 잘 것이오.”
1967년 3월 22일, 이수근 북한중앙통신 부사장이 판문점 북측 지역을 탈출해 남측으로 귀순하며 내뱉은 첫마디였다. 오후 5시, 제 242차 남북군사정전위원회가 끝나는 순간 이수근은 재빨리 UN군 대표 밴 크러프트 준장의 세단 승용차에 올랐고 40여 발에 이르는 북한 경비병의 총탄을 피해 자유대한의 품에 안착했다.
남한에서 결혼과 반공 강연을 이어가던 그는 원했던 자유 생활과 달리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마찰이 계속되자 회의를 느껴 다시 탈출을 감행했다. 69년, 여권을 위조해 캄보디아로 향하던 이수근은 이중간첩 혐의로 중정 요원들에게 체포됐고 그 해 5월 항소심도 받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그의 이중간첩 혐의를 조작이라 판단했고, 3년 후 서울고등법원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
한국일보 김운영기자는 판문점에서 귀순한 이수근이 헬기 편으로 용산 미군기지에 도착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손용석 멀티미디어부장 stones@hk.co.kr
1967년 3월 22일 오후 5시 40분, 판문점에서 열린 제 242차 군사정전위가 끝난 후 북한 중앙통신 이수근 부사장이 회의장 앞에 서 있던 UN군 대표 밴 크러프트 준장의 승용차에 뛰어 들었다.
북한군은 총를 쏘아대며 저지했고 2명의 경비병이 차 뒷좌석에 숨은 이 씨를 끌어내리려 했으나 유엔군 작전장교 베어 대위가 이들을 때려 눕혔다. 차는 전속력으로 내달려 북한 경비초소를 통과해 남측 지역에 안착했다.
이수근의 판문점 귀순사건은 모든 언론이 1,2,3면을 할애해 주요 뉴스로 다뤘다.
당시는 거의 모든 신문이 8면 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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