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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응답하고 싶지 않은 1997년 겨울

입력
2015.03.1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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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 해고 통보를 받았던 한 회사원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 해고 통보를 받았던 한 회사원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7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꿈속에 나타날 정도로 오싹한 장면이 있다. 온 나라가 IMF 구제금융의 한파로 얼어붙었던 1997년 겨울 즈음. 서울 마포 인근 한 대기업 계열사 사옥 앞에서 목격했던, 벽을 기대며 3, 4층 높이로 쌓인 퇴직자들의 책상과 집기들이 연출한 살풍경이다. 살점 뜯긴 뼈다귀처럼 만질만질했던 책상다리, 변사체의 팔다리처럼 구겨져 꺾여 있던 의자의 팔걸이들이 얼기설기 이룬 ‘탑’에선 찬 거리로 내몰렸을 퇴직자들의 사연이 풍기는 피 냄새가 났다. 199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화장터와 같았던 그 을씨년스러움은 그래서 악몽 속에서 킬링필드의 유골탑과 뒤섞이곤 했다.

다신 현실에서 마주치지 않으리라 믿었던 경제위기들은 하지만 지난 17년 동안 여러 차례 눈앞으로 닥쳐왔다. IMF사태를 극복하느라 주저앉아버린 소비 심리를 끌어올리겠다고 무차별적으로 신용카드를 발급해주다 발발했던 2003년의 카드 대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등 해외에서 옮겨 온 불씨가 큰불로 자랐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이다.

최근 들어 곳곳에서 고통스러웠던 경제위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경고음이 심상치 않게 들려온다. 고령사회의 시작과 금리 인상 등 강한 달러를 앞세운 미국의 반격이 본격화되는 올해 말을 전후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신흥국들이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게 되리라는 학자들의 예고다. 미래학자인 최윤식 뉴욕주립대 미래기술경영연구원 원장은 지난해 말 내놓은 책 ‘2030 대담한 미래’에서 “2015년부터 2017년 사이에 미국이 꾸준히 금리를 인상하면 우리나라와 아시아 국가들에서 미국과 유럽의 자금이 대거 탈출하고 투자가치가 떨어진 한국의 기업, 은행의 신용등급이 줄줄이 하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런데 그가 특히 방점을 찍은 위기의 ‘시그널’은 하필이면 요즘 정부가 부양에 공을 들이고 있는 부동산이다. 금리인상과 함께 저출산ㆍ고령화에 부동산 시장의 발목이 잡히고, 현 정부 말 2,000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가계부채 중 상당 부분이 부실의 영향권에 놓일 것이라는 시나리오이다. 여기에 만성화된 내수 침체와 각종 자산 담보 가치 하락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면 영락없이 우리 사회는 1997년의 겨울과 같은 위기와 당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허술한 모래 위에 누각을 쌓듯이, 부실한 실물경제 위에서 덩치를 키워가는 부동산시장은 언젠가 경제위기의 부메랑으로 우리를 덮칠 수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고는 부동산 시장 부양을 통해 내수를 끌어올리고 경기를 살려보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 핸들링이 자칫 악성 가계부채의 키를 높이고, 금융 약자들을 더욱 가파른 벼랑으로 몰아세우는 결과를 부를 것이란 우려로도 읽힌다. 정부는 지난해 부동산담보대출 규제완화와 청약제도 개편에 이어 급기야 한국은행의 금리인하를 이끌어 전세난에 지친 소비자들이 보다 쉽게 집을 사도록 끝없이 유혹하고 있다. 기준금리가 내려가자 은행들은 세입자들이 더욱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문턱을 낮추고, TV를 비롯한 모든 미디어는 대부업체와 저축은행들이 쏟아내는 대출상품 광고로 차고 넘친다. “돈을 빌려 집을 사지 않고 전세를 고집하는 바보는 세상에 당신 하나 뿐”이라고 조롱하듯 말이다.

값싼 가계부채, 이를 양분으로 자라는 부동산 시장이 학자들의 경고처럼 안타깝게도 우리가 맞이할 다음 경제위기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이미 미 연방준비제도가 늦어도 연말까지는 금리를 인상할 것이란 분위기가 굳어졌고, 집을 꾸준히 구입하며 경기를 띄워줄 생산인구는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년 뒤, 부동산을 살리겠다고 가계부채로 군불을 피웠던 정부의 정책 결정이 실패로 확인된다면 다시 한번 서울 도심 어느 한 곳에서 17년 전 그날의 ‘탑’을 발견했다는 목격담을 듣게 될지 모른다.

양홍주 경제부 차장대우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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