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풀을 뜯어먹듯 한다.” 얼마 전 한 학자가 인문학이 소비되는 풍토를 개탄한 말이다. 인기 있는 분야에는 사람들이 몰리는 반면, 그렇지 않은 분야는 무시한다는 것이다.
편식하며 듬성듬성 공부하는 양상은 철학에서도 뚜렷하다. 플라톤의 ‘국가’같은 책은 한 출판사를 먹여 살리는데 반해 유명세가 조금 떨어지는 고전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잠잔다. 뜨는 철학자의 책은 수십 종이 줄줄이 번역되는 반면에 다른 양서들은 아예 외면된다. 대학에서 영미철학, 대학 밖에서는 프랑스 철학만 강의되다시피 하는 현상도 그렇다.
벌써 보릿고개가 시작되는가. 새해가 시작되면서 반짝 늘었던 공동체의 강의 참여자 수가 3월이 되면서 많이 줄었다. 1월에는 제법 찼던 방들도 이젠 듬성듬성해졌다. 춘궁기일수록 인문학이 편식되는 모습도 두드러진다. 들뢰즈나 니체, 스피노자에 대한 강의에는 여전히 사람이 모여든다. 그러나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하는 헬레니즘 철학 강의는 열리지도 못했다. 나름으로는 의욕을 가지고 준비했던 실험적인 강의나 세미나도 줄줄이 연기하거나 취소했다.
이럴 때 더 문제되는 것은 장기간 지속되는 강좌다. 보릿고개를 넘는 사이, 장기 강좌일수록 눈에 띄게 쇠약해지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전권 강독은 6개월여가 지나도록 절반에도 못 미쳤다. 지난해 이 맘 때 시작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강독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주역’ 원전 강독 역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과연 몇 사람이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그러니 만 2년, 85강을 이어왔는데도 참여자가 줄지 않는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독은 기적에 가깝다. 1년 반이 지나도록 참여자가 꾸준히 이어지는 지젝의 ‘헤겔 레스토랑’ 강독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강독에 참여하는 이들이 작은 결의 모임을 가졌다. 끝까지 가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3개월 정도 지속된 이 강의는 이제 9개월 가량 남았다. 장기 강좌를 마지막까지 이어가려는 노력은 공부 모임마다 제 각각이다. 어떤 이는 강의를 빠짐없이 녹음해 새로운 참여자에게 제공하고, 아예 녹취록까지 작성해 공유하는 모임도 있다. 지금까지의 강의안을 모두 챙겨두었다가 새로운 참여자와 나누는 건 기본이다.
엊그제 공동체에 두 학자가 찾아왔다. 한 사람은 당송 시대의 문학으로, 또 한 사람은 조선 시대의 식(食ㆍ음식)과 색(色ㆍ남녀관계)으로 각각 학위 논문을 쓴 학자였다. 가뜩이나 춘궁기, ‘논어’나 ‘도덕경’ 강독에도 사람이 오지 않는데 당송대의 시를 강독하면 사람이 올 것인가. 조상들의 음식이나 남녀 관계가 재미있긴 하지만 이를 한문으로 된 책들을 읽어가며 정색하고 공부하려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이들에게 제안했다. 책을 기획하듯이 강의나 세미나를 준비하면 어떨까. 참여자 수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강의를 준비해 그 결과를 책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최악의 경우에도 책 한 권은 남지 않겠는가. 이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늘 마음먹으면서도 미루었던 책 쓰기를 강의를 계기로 결행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책까지 쓰겠다며 준비하는 강의가 부실할 리 없으니 이는 참여자에게도 이득이다. 기껏해야 10명 안팎이 듣고 허공에 흩어지는 강의가 책이 되면 수 천, 수 만 명이 읽을 수 있는 콘텐츠로 바뀐다.
초보적이긴 하지만 공동체에서는 이미 이런 강의,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다. 새해 들어 시작된 미학 입문이나 철학사, 소설쓰기, 현대철학 입문, 푸코 강의가 그것이다. 강의와 책의 연결은 대부분 입문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머잖아 더 깊고 전문적인 분야로도 확대될 것이다.
춘궁기가 깊은 흉년으로 이어질까.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풀뿌리로 연명할수록 씨앗심기에 더 마음을 모을 필요가 있다. 공동체가 보릿고개를 넘는 법이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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