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영국의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교수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영국 대학교수가 하버드에서 한국 관련 책을 냈으니 한국 학계가 흥분한 것은 일견 당연했다.
도이힐러는 이 책으로 1993년 ‘장지연상’과 2001년 ‘용재학술상’을 수상했고, 대우학술총서로 번역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한국의 친족과 사회, 그리고 사상과의 관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담론들과 주요 연구성과들은 주로 한국 밖의 연구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현실”이라며 한국 학계를 비판했다.
그런데 도이힐러의 책은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국가족사연구(1983)’를 송두리째 베낀 것이었다. 최 교수는 하버드대에 이런 사실을 알리면서 비판문 게재를 요청했으나 묵살하자 ‘사회와 역사(The Review of Korea Studiesㆍ2005)’에 영문 논문을 게재해 반박했다. 필자가 찾아보니 도이힐러의 책은 아직도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모노그래프(Monograph) 시리즈로 판매되고 있었다. 하버드 역시 이 분야에서만큼은 자신들만의 리그가 학문보다 우선한다는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올해 구순에 달하는 최재석 교수의 자서전 제목이 ‘역경의 행운’인 이유가 있다. 국내 학자들이 도이힐러 대신 도리어 최재석 교수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최 교수는 “자기 나라 학자의 연구물을 송두리째 베낀 외국인의 책을 최고의 저서로 인식함과 동시에 표절 당한 자기 나라 학자를…격하시키는 나라가 세상에 한국 말고 또 어디에 있는가?(155쪽)”라고 개탄하고 있다.
상당수의 한국 학자들이 공부 너무 안 한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비밀도 아니게 되었지만 최 교수는 역으로 너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어왔다. 그는 책 서문에서 “학문하는 사람 가운데 나만큼 그러한 고통을 겪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역경이나 고통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고통을 겪을 때마다 “나는 더욱 연구에 몰두”했고 그 결과 300여 편 이상의 연구논문과 30여권의 학술저서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한 해방 이후 한 학자가 거둔 최대·최고의 연구 성과이다.
최 교수는 한국가족사를 연구한 사회학자이자 고대 한일관계사를 연구한 역사학자이다. 그가 두 분야의 전공을 갖게 된 것은 한국 고대가족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학자들이 한결같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그 진위 추적에 나선 결과였다.
최 교수는 1985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과연 조작되었는가”라는 논문을 필두로 한국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비판하는 여러 논문과 저서를 간행했지만 식민사학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학계는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한국사회학회에서 네 번씩이나 최 교수를 학술원 회원으로 추천했지만 학술원은 그때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탈락시키고 대신 연구논문 한 편 없는 이모, 홍모 교수를 선출했다. 식민사학의 산실인 와세다대학에서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같은 대학의 교수가 된 한 교수는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최 교수의 논문을 단번에 게재불가 판정을 내렸다. 이런 회고를 읽다 보면 해방 70여년이 되도록 노벨상 수상자 한 명 없는 현실이 자연히 이해된다.
한 집안의 족보 변화를 통해 가족사를 연구한 부분도 흥미롭다. 명종 17년(1562)에 간행한 문화 류씨(文化柳氏) 족보는 10권인데, 127년 후인 숙종 15년(1689)에 간행한 족보는 5권으로 줄어들었다. 외손(外孫) 배제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으로 17세기 들어서야 동성동본 집단인 씨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유래가 오랜 것으로 알고 있는 씨족집단이 불과 몇 백 년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역경의 행운’에는 학계의 민낯이 실명으로 드러나 있는데 최 교수는 “이 책에서 진실을 남겨 놓고 싶어서 내가 겪은 일들을 그대로 기록”했다면서 각 개인들이 경험한 사회적 부조리를 고발하는 만큼 “사회의 선진화가 촉진”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역경의 행운’이란 역설적 제목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신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도전했던 한 인간 율리시즈의 고난에 찬 역정에 의해 사회가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고통 속에서 깨닫는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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