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학점 따기용으로 변질
"장학금·졸업의 조건이라서… 짓누르는 봉사 아닌 봉사가 미워"
봉사, 필수다. 학점을 따기 위해 봉사를 하고 취업을 위해 봉사를 나간다. 봉사 없인 학사모도 못 쓰고 봉사 없인 돈도 못 벌 지경이다. 그래, 내가 속한 사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쓴다는데, 보람도 느끼고 경험도 쌓을 수 있다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남들은 ‘스펙’ 쌓기 위해 해외 봉사활동 모집에 줄을 선다는데 어느 봉사든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 아닌가. 그저 주변 사람과 내게 도움되는 일이려니 하는 생각만으로도 몸을 움직이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그런데 요즘 봉사가 봉사가 아니다.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봉사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자발적으로, 내가 원하는 쪽에서 남을 위해 일하고 싶다. 굳이 대가를 바라면서 봉사하는 듯한 현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의무봉사라는 말도 마음에 걸린다. 봉사가 의무라니? 국방의 의무도 아니고 말이야. 취업 스트레스에 찌들고 아르바이트 격무에 치이고 공부에 시달리는 대학생들 어깨를 봉사 아닌 봉사가 짓누르고 있다. 요즘 대학생들 봉사 아닌 봉사가 밉다.
봉사활동은 학점 따기용
학점을 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부만이 아니다. 사회봉사 활동 잘하면, 아니 시간만 채우면 학점을 얻을 수 있다. 사회봉사 학점은 학교마다 다르다. 대부분 교양과목으로 지정돼 있는데 한 한기 32~40시간 봉사활동을 하면 1학점을 얻을 수 있다. 서울 한 대학의 경우 세 차례에 걸쳐 3학점까지 사회봉사 학점을 딸 수 있다. 32시간 봉사활동을 하면 1학점씩을 얻으니 96시간 봉사활동을 하면 3학점까지 받을 수 있다.
사회봉사 학점의 좋은 점은 여러 가지다. 일단 고득점을 받아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봉사활동의 우수성 정도에 따라 A, B, C 등으로 점수를 주지 않는다. 봉사활동을 채우면 통과(Pass)이고 못 채우면 학점을 못 얻는다. 학생들이 사회봉사 ‘과목’(!)을 수강하는 주요 이유다.
또 하나의 장점.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매주 꼬박꼬박 정해진 시간에 수업을 들어야 하는 다른 과목과 달리 편한 시간에 몰아서 봉사활동을 해도 된다.
총학생회도 사회봉사 학점을 활용한다. 대학생농촌봉사활동(농활)에 학생들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학점을 내세운다. 바로 이런 식. 1학점에 필요한 32시간의 봉사활동에 맞춰 농활 일정표를 만든다. 농활에 참여하며 바로 사회봉사 학점 취득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대학 4학년 박모(여)씨의 경험.
“2학년 때 농활을 갔다. 농활이라는 경험을 해보고 친구들이랑 추억도 만들 수 있었는데 1학점까지 받았다. 학생회는 학생들 모집이 수월해서 좋고 학생들은 여러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봉사활동이 있으랴.”
봉사활동이 매번 달콤하지 않다. 무의미한 노동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자각도 많고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봉사활동이 마음에 걸린다. 사회봉사 과목이야 원하는 사람만 신청해 학점을 얻어간다고 하나 봉사활동 자체가 졸업 필수 요건에 들어가는 경우가 그렇다. 군대 제대 뒤 복학한 대학 3학년 김모씨는 입학 당시 사회봉사 과목을 꼭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했던 학번이다. 1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2년 전 2학년 겨울방학 때 과천과학관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동기들은 보통 1,2학년 때 봉사활동 학점을 해결했다. 나는 과천과학관에서 어느 테마관을 맡아 관람객 안내를 했다. 주 1,2회 정도 아침에 출근해서 하루 5,6시간 정도 일을 했다. 과천과학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이유? 집이 있는 안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라 이곳을 정했다. 솔직히 귀찮다고 생각했다. 주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사회봉사 활동을 해야 졸업도 하고 취업도 할 수 있으니까. 의무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점에선 군복무랑 비슷하다고 할까.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와 고아원에서 일한 친구들은 그래도 보람을 느꼈다고 하는데, 난 그렇지 못했다.”
대학 4학년 금모씨는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봉사는 봉사가 아니라는 생각에 사회봉사 과목 수강을 아예 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학점 때문에 봉사를 하니 봉사시간 인증이 가능한 기관에서만 봉사를 하게 된다. 정작 손이 모자란 작은 기관에서는 봉사활동을 못하게 된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사회봉사 과목이 2학점인데 다른 과목을 신청했으면 1주일에 2시간 수업에 해당하는 학점이다. 사회봉사 과목을 신청하면 1주일 당 2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봉사야 몰아서 하면 된다. 그렇게 효율성은 있지만 봉사는 마음으로 해야 하지 않나.”
노역으로 변질된 봉사
장학금 지급 조건이 봉사활동인 대학도 있다. 공부만 하지 말고 주변도 돌아보는 취지는 이해하나 학생들은 야속하기만 하다. 공부 잘하고 봉사까지 잘하는 만능 모범 학생이 되라니… 한국 사회는 젊은 세대에게 원하는 게 너무 많다. 대학 4학년 허모씨의 성토.
“내 동생이 다니는 학교는 장학금을 받으려면 봉사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성적우수장학금의 취지가 뭐냐? 공부 잘하는 애들 공부 더 잘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형편 어려운 학생 공부에 전념하게 돕자는 것 아닌가. 봉사시간이 반영되면 원래 공부로 장학금을 받아야 할 학생이 받을 기회를 잃게 된다.”
사회가 온통 봉사를 의무로 하고 봉사를 반드시 행해야 할 선으로 치장하니 희한한 봉사 아닌 봉사 활동도 나타났다. 봉사를 가장한 노역 동원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봉사를 빌미로 교수가 십장이 되고 학생들이 잡역부가 된다.
대학 4학년 박모씨는 지난해 늦가을 조금은 황당한 봉사활동을 했다. 전공과목 교수가 학생들에게 강의와는 무관한 봉사활동 참가자를 모집했는데 자원이 아닌 강제적 동원에 가까웠다. 교수가 관여하고 있는 한 동물보호단체 주최 이틀 일정의 바자회 일이었다.
일요일 2,3시간 동안 책상을 옮기고 풍선을 달았고 번호표도 만들었다. 다음날에도 참가한 학생이 있었으나 박씨는 다른 과목 수업 때문에 하루만 ‘봉사’했다. 학생들의 단순노동에 대해 교수는 당근을 내걸었다. 하루 당 10점씩 성적에 반영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수는 가고 싶은 사람만 가라면서도 참가자에만 점수를 준다고 했다. 결국 모두 참가하라는 말 아닌가. 전공과 관련된 일이라면 뭔가를 배운다는 생각도 있었을 텐데… 월요일 다른 수업이 있던 나 같은 학생들은 점수 손해도 봐야 했다. 더 기가 막힌 건 나중에 10점이 아닌 0.5점씩을 줬다는 것이다.”
조모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학회에 참석해 ‘봉사’를 하게 됐다. 수강 과목 교수가 봉사 참가자에게 점수를 더 주겠다고 공약을 해서였다. “업무를 배운다기보다 사람들 안내하고 물건 나르는 잡일이 대부분이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박준호 인턴기자(동국대 불교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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