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고 했던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이면 만나게 되고, 아무리 애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어쩔 수 없다는 불가 용어다. 이 무렵이면 선암사 홍매화가 좋다 하길래 순천을 다녀왔다. 사방에 봄소식이지만 18일 현재까지도 선암사 홍매화는 아직 봉우리만 붉게 부풀어 오른 상태다. 그래도 남도 곳곳에서 터져 오르는 봄기운은 어쩌지 못한다. 같은 순천 땅에서도 꽃피는 시기가 제각각이다.
시적 선암사 vs 철학적 송광사, 고찰 품은 조계산
‘조계산(884m)은 그렇게 높지도 않고 기암괴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품이 깊은 청산이라서 나는 마음속으로 어머님 산이라고 생각한다. 선암사와 송광사는 양쪽으로 어머님의 젖가슴에 자리잡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명찰이다’ 20여년간 송광사 불일암에 기거했던 법정스님의 평이란다.
조계산을 중심으로 선암사는 동쪽, 송광사는 서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지만 두 사찰이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선암사가 여성적이고 시적이라면, 송광사는 학문적이고 철학적이다” 순천시 문화관광해설사 김영석씨의 평이다.
선암사(仙巖寺)가 시적이라는 것은 매표소를 통과하면서부터 느낄 수 있다. 1km 남짓 잘 닦여진 비포장길은 2006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길과 함께 이어지는 계곡물소리에 통통 튀는 봄 내음이 묻어난다. 아직까지는 앙상한 가지 사이로 파고드는 한 줌 햇살이 고마운 시기지만, 여름이면 아름드리 참나무와 서어나무 군락이 터널을 만든다.
선암사에서 꼭 봐야 할 것으로 승선교와 선암매 해우소(뒷간)을 꼽는다. 선암사 경내로 들어서기 전 개울을 건너는 두 개의 다리를 만난다. 바로 가면 빠르지만 굳이 하선교를 지나 바로 위 승선교를 건너 제 길로 되돌아온다. 승선교는 계곡 자연 암반에 아치형으로 멋을 부린 석조 교량으로 보물 400호로 지정돼 있다.
선암사에는 천연기념물 488호로 지정된 선암매(홍매·백매·청매)를 비롯해 왕벚 올벚 철쭉 등 꽃나무만도 80여 종이다. 사찰 풍경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이름만으로도 화려하다. 꽃이 없어도 선암사는 이미 봄이다. 조릿대와 차나무 꽝꽝나무 동백 금식나무 등 상록수가 경내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한창 물이 오른 잎사귀가 봄볕에 더욱 싱그럽다.
‘눈물이 나거든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에서 실컷 울어라’정호승의 시가 아니라도 선암사에 가면 꼭 화장실(뒷간)을 들러봐야 한다. 그냥 둘러볼게 아니라 재래식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봐야 한다.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아주고’하는 시적 체험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나무창살로 시원하게 들어오는 바람과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김용택 시인이 마음을 두고 온 ‘오래된 담장에 기대선 매화나무’는 원통전 주위에 50여 그루가 있다. 장현주 해설사의 표현을 빌리면 “이곳 매화는 화려하지도 누추하지도 않고, 향기가 헤프지도 않다.” 21일 홍매화 축제가 계획돼 있지만 오래 지켜본 이들의 말로는 3월 말은 돼야 만개할 거라고 한다. 매화가 지고 4월 초면 가지를 늘어뜨린 올벚이 운치를 더하고 곧이어 수 백 년 된 철쭉이 붉은 꽃을 피우는 등 선암사에는 그야말로 꽃 잔치가 이어진다.
조계산 맞은편 송광사는 화려함보다는 고찰의 위엄과 기품으로 무장하고 있다. 입구에 버티고 선‘승보종찰조계산송광사(僧寶宗刹曹溪山松廣寺)’라고 쓴 대형 탑신이 사찰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하고 있다. 승보사찰은 부처의 진리를 포교하는데 주력하는 사찰로 송광사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곳이다. 국사(國師)는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에게 내리는 칭호다. 종찰은 민가로 치면 종갓집이니 엄격함은 말할 것도 없겠다.
사찰 입구 계곡을 가로지른 청량각 천장에는 2마리 목각 용이 마주보고 있다. 속세 쪽 용은 여의주가 없고, 맞은 편 용은 여의주를 물고 득도한 모양새다. 부처의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깨달음을 얻고 가라는 뜻이 담겼단다.
약 1km 숲길을 걸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송광사를 있게 한 17위의 공적비다. 공적비로 오르는 계단에 숨은 사연 하나. 계단 양편에 놓인 소매 돌에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선 고종 때 암행어사였지만 온갖 악행으로 이름난 관리의 자찬 공덕비를 세로로 잘라 계단 양편에 뉘였다. 중생을 먼저 생각하는 불가의 교훈이 남은 흔적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개울 옆에 침계루(枕溪樓)라는 큰 건물이 눈길을 끈다. 계곡을 베고 누운 누각이라는 이름처럼 길이가 다른 8개의 기둥이 개울의 경사에 맞춰 건물을 떠받치고 있다. 자연을 닮은 멋스러움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붉은 기둥과 파란색 창문의 조화에도 송광사의 절제가 엿보인다. 송광사에서 꼭 봐야 할 것으로 ‘비사리 구시’(싸리나무로 만든 구유, 실제로는 느티나무로 만든 것으로 4천명 분의 밥을 담을 만큼 크다)를 치지만, 정작 이 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속적인 욕심과는 거리가 먼 불가의 품격이 아닐까.
송광사 봄 풍경은 바깥에 있다. 벌교와 주암을 잇는 15번 국도에서 사찰 주차장에 이르는 1km 구간의 가로수가 모두 벚나무다. 4월 초면 오래된 벚나무에서 피어나는 고고한 봄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올망졸망 생기가 꿈틀대는 낙안읍성
선암사에서 매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금둔사에서 대신할 수 있다. 금둔사는 낙안읍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금전산 중턱에 있다. 도로 바로 위여서 힘들게 오를 일도 없다. 금둔사는 음력 섣달부터 꽃을 피운다는 납매(臘梅)로 유명하다. 산중턱임에도 양지바른 남향으로 자리잡아 홍매와 청매가 한창이다.
금둔사에서 차로 5분여 거리의 낙안읍성은 해미읍성 고창읍성과 함께 전국에 3개 남은 읍성 중 하나다. 다른 두 곳과 달리 98세대 228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어 민속마을로 불린다. 객사와 동헌 옥사를 빼면 거의 모든 건물이 초가지붕인 것도 특징이다. 마을 북측에 위치한 동헌 앞에 서면 조선시대 대표적인 계획도시라는 사실이 한층 분명해진다. 건물 뒤편 금전산은 서울로 치면 경복궁 뒤 북악산이고, 좌우의 산세도 낙산과 인왕산을 닮았다.
동헌으로 들어서면 양손을 뒤로 묶인 죄인이 사또 앞에서 추궁을 받는데 마당 한 켠에선 매화향기 그윽하다. 곡 소리 쩌렁쩌렁할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에 은은한 매화향기라니. 낙안읍성을 효율적으로 보는 방법은 1,410m 성곽 길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다. 방향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마을과 산세가 정겹다. 남서쪽 성곽에서는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올망졸망한 초가 사이로 앞마당의 텃밭까지 생동감 넘치는 삶터다. 지금은 곳곳에 심은 산수유 꽃송이가 마을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낙안읍성은 동남서 3개의 성문 중 동문이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동문 주차장 주변에 음식점이 많다. 읍성 안에도 4개의 난전 음식점이 있다. 국밥과 산채정식 등 식당마다 메뉴가 달라 골라잡을 수 있다.
순천만 갈대밭 돌아 와온해변에 쉬다.
순천 관광안내에 꼭 따라붙는 수식어가 ‘대한민국 생태수도’다. 두말할 것도 없이 순천만이라는 천혜의 자연습지 역할이 크다. 이름 때문에 외지인은 헷갈리기 쉽다. 지난해 정원박람회를 한 ‘순천만정원’은 순천시내에 위치하고 있다. 갈대 숲으로 유명한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은 시내를 관통하는 동천이 바다로 흘러 드는 끝자락이다. 순천역에서 순천만정원은 약 2km,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은 9km가량 떨어져 있다.
겉모양만 본다면 3월 순천만은 어정쩡한 시기다. 갈대의 풍성함은 늦가을에 미치지 못하고, 파릇한 생기는 초여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럼에도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것은 명성이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순천만엔 먼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흑두루미 날개 짓으로 분주하다. 생태관 앞 울타리 너머 인안들에는 뚜르르 뚜르르 흑두루미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지난해 10월 순천만에 모습을 드러낸 흑두루미는 1005마리로 관찰됐다. 통상 3월말이면 시베리아로 모두 떠나기 때문에 올해 마지막 흑두루미의 모습을 보려면 조금 서둘러야 한다.
순천만 갈대밭은 데크로 연결돼 있어 습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한가로이 봄기운을 즐길 수 있다. 생태만 고려한다면 자연상태로 놓아 두는 게 바람직한데, 일부는 베어내 이엉과 울타리 공예품 만들기에 사용한다. 관람객들이 파릇하게 돋아나는 새순을 볼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도 있다. 바싹 마른 갈대 줄기는 지금 황금빛을 띠고 있어서 빛깔은 더욱 곱다. 멀리서 보면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연상시킨다.
갈대밭 데크가 끝나는 지점에서 용산 전망대까지 1.3km 산책로가 이어진다. 왕복 40분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할만하다. 일부 가파른 구간에는 나무데크와 왕골을 깔아 걷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다. 높지 않은 산인데도 위에서 보는 순천만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다. 갈대밭과 인안들을 휘감아 나가는 물길 사이로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자연 습지가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순천만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은 갈대밭 입구 무진교 아래 선착장에서 생태체험선을 타는 것이다. 용산전망대에서 보는 S자 물길을 따라 습지 생태를 좀더 생생히 관찰할 수 있다. 운항시간 30분, 요금은 어른기준 7,000원이다.
순천만에서 일몰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으로 와온해변이 있다. 모래사장 대신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 뻘 해변이다. 용산전망대와 달리 이곳에선 느긋하게 해변산책길을 거닐며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면 사기섬(이곳 주민들은 상섬으로 부른다)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갯벌에 물이 고인 지점마다 점점이 노을이 떨어진다. 담황색으로 곱게 물든 갯골(갯벌 사이로 난 작은 물길)에 지친 마음 내려놓고 숨가쁘게 달려온 여정을 되돌아보며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순천=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여행메모]
●순천완주고속도로 개통으로 많이 빨라졌다지만 서울에서 순천까지는 바쁘게 가도 4시간, 여유 있게 가면 5시간이다. 열차를 이용하면 시간과 피로를 줄일 수 있다. 서울 용산역에서 순천역까지 KTX로 현재는 3시간 15분 정도 걸린다. 다음달 2일 KTX호남선이 완전 개통하면 2시간 30분으로 줄어든다. ● 현지에서는 코레일과 연계한 카셰어링 서비스 유카(www.youcar.co.kr)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역 주차장에서 바로 탈 수 있다. 앱을 이용해 차문을 열고 잠그는 시스템을 갖췄고, GPS와 연동해 주행거리에 따라 자동으로 주유비가 계산된다. ●선암사는 호남고속도로 승주IC에서 가깝고, 송광사는 주암IC에서 가깝다. 송광사-낙안읍성-선암사 순으로 이동하면 순천 서부지역을 두루 훑어 볼 수 있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에서 와온해변까지는 빤히 보이는 거리지만 찻길로는 약 30분이 걸린다. 17번 국도를 이용해 여수방향으로 이동하다 율촌교차로에서 빠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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