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조금 늦은, 서른 셋에 결혼을 했다. 딸만 둘인 부모님은 맏이인 내가 서른이 넘어가면서 점점 조급해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는 인연을 내가 어찌하리. “결혼을 보채면 집을 나가 독립하겠다”는 엄포를 놓고서야 “시집가라”는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속 태우며 새벽마다 기도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나도 모를 리 없었다.
아빠는 토목과 토질을 공부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6ㆍ25 전쟁이 터진 지 열 하루 만에 태어났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순하고 성실하고 재미있는 그런 사람이다. 대학 때 가족여행으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간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건축물들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지만 넝마를 들고 구걸하는 아이들, 갓난애를 안고 손을 벌리고 길에 앉아있는 여자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고 너무나 심란했다.
결국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몰려드는 거지 아이들을 귀찮아 했던 내 마음이 밉고, 그 애들의 까맣고 착한 눈이 생각나 엉엉 울기도 했다. 내가 우는 동안 아빠는, 이 나라는 왜 이렇게 가난할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잘 살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결심했단다. 다시 와서 도와주겠노라고. 환갑을 목전에 두고 아빠는 코이카를 통해 봉사활동을 떠났다. 2년간.
아빠가 공항에서 남긴 이야기는 두 가지였다. 엄마를 잘 돌봐드릴 것.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짝을 찾을 것.
아빠가 집을 비우고 엄마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문득 드라이브를 하자며 엄마 손을 잡고 일어나는 아빠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는 섬세하고 감상적이다. 나의 못 말리는 눈물샘과 짙은 감수성은 엄마를 빼다 박았다.
봄이 되어 꽃 소식이 들려오던 어느 날 엄마가 창 밖을 보면서 그랬다. “아빠는 이맘때 항상 꽃놀이 가자고 했는데…. 그러고 보면 아빤 참 낭만적인 사람이지?” 그때 엄마 얼굴 옆으로 비치던 그 외로움과 그리움을 어찌 못 본 척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늘 아빠가 그랬듯이 외쳤다. “가자!”
둘이서 갑자기 쌍계사로 떠났다. 가는 내내 우리는 들떴고, 즐거웠다. 많이 먹고, 많이 웃었다. 행복했다. 쌍계사의 벚꽃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쌍계사 입구도 아직 멀었다는데 시작 된 벚꽃길. 강을 끼고 이어진 그 하얀 구름길. 창문을 열고 눈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맞았다. 입술이나 이마에 떨어지는 그 보드랍고 여린 감촉에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키스자렛의 피아노를 들으면서 그 눈부심을 온몸으로 맞았다.
차를 세우고 걸어가면서도 끝없이 ‘우와’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얗고 탐스러운 꽃송이들은 소리 없이 고왔다. 고요하면서도 어지러웠다.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꽃잎들을 따라 취한 듯 건들거리며 걸었다. 아름다움으로 가득해 세상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까맣고 단단한 나무 줄기는 대체 무슨 힘으로 뚫고 나왔을꼬. 아직 날이 쌀쌀한데 봄인지 어찌 알았을꼬. 이 여린 것들이 찬 바람을 어찌 견뎠을꼬.
연인들이 손잡고 많이 걷고 있었다. 조금 부럽기도 했지만 그때 뭔가 예감 같은 것이 있었다. “너도 저렇게 데이트로 왔어야 하는 건데….”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섞인 엄마의 그 말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즐겨줘, 나와의 이 시간을! 나 결혼하면 얼마나 그리워하려고!” 엄마랑 내가 팔짱 끼고 걷던 꽃 터널. 사랑스럽고, 더없이 멋졌다.
신기하게도 그 해에는 엄마와 꽃놀이를 세 번 갔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나는 결혼했다. 정말이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저 그 순간을 살아야 한다. 이왕이면 행복하게! 지금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 바라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내게로 와야 하는 것들은 반드시 온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음 때문에 재미있지 않은가?
꽃별 해금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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