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내 얼굴’을 간판에 넣었다. 근사한 대형 점포도 아니고 유명 연예인 같은 세련된 포즈도 아니지만 이들이 가게에 내 건 각각의 얼굴 사진은 그 자체로 강력한 브랜드다. 동네 점포 사장님들이 들려주는 얼굴 간판 이야기 속에서 불황을 극복하는 창업 전략도 숨어 있다.
왼쪽부터 '달인꽈배기' 임춘식대표, '현대공인중계사' 김은선대표, '서울가발박사' 장만우원장, 야채가게 '훈기와 태영이네' 정훈기, 허태영 사장
김은선(59)씨가 자격증을 딴 20년 전만해도 여성 공인중개사가 흔치 않았다. 배운다는 심정으로 사무실을 낸 지 한 8년쯤 됐을 때다. 꽤나 먼 동네로 이사간 옛 손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최 우선으로 일을 처리해 주고 나서 단골 고객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일단 자신을 알리는 게 급선무였기에 간판에 사진을 넣기로 했다. “여자가 무슨 얼굴까지 걸고 부동산을 하느냐”는 남편의 핀잔을 뒤로 하고 사진관을 찾아갔다. 너무 날카롭게 나온 사진과 펑퍼짐하게 나온 사진 등은 과감히 버리고 가장 나은 사진을 골라 간판을 맞췄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김씨의 사무실은 ‘간판에 사진 걸린 부동산’으로 통한다. “사진이 너무 오래된 거 아니냐”는 고객들에겐 “그냥 브랜드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너스레를 떤다. 간판을 새로 제작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김씨는 간판 속 자신의 사진을“신뢰감과 양심, 자신감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간판에 사진 걸어놓고 양심에 찔리는 일은 못하죠. 항상 진심으로 대하다 보면 손님은 감동하기 마련”이라며 “그렇다고 진정성 없이 무조건 사진만 걸면 되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객지생활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혼자서 자수성가 한다는 건 더더욱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꽈배기만 30년을 만들어 온 임춘식(57)씨는 돈을 벌기 위해 상경했던 스무 살 적 기억을 더듬었다. 딱히 특별한 기술도 없는 시골 청년에게 직업 선택의 기회는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임씨의 첫 직장은 분식집 주방이었고 어느 날 우연히 꽈배기 가게를 인수하면서 임씨의 30년 꽈배기 인생이 시작됐다. “옛날 꽈배깁니다. 옛날 사람들이 먹었던 옛날 맛, 계란이나 방부제가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서민의 맛이 인기의 비결이죠” 37년 전과 똑 같은 방식으로 꽈배기를 만들고 있다는 임씨는 자타 공인 ‘달인’이다. 임씨 스스로가 점포의 인지도를 높이는 효과적인 광고 모델이다. 소박한 꿈을 얘기하며 임씨는 활짝 웃었다. “간판 사진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보면 책임감을 느끼죠. 지난 30년처럼 맛도 변함 없고 사람도 변함 없이 앞으로도 지금 같았으면 좋겠어요”
서울 영등포역 부근 대로변에 조금 특별한 점포가 자리잡고 있다. 대형 간판도 모자라 크고 작은 가발 광고물이 외벽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가발 착용 전, 착용 후’비교 사진과 학사모를 쓴 인물사진은 그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이미지로 모델은 사업주 장만우(62)씨다. “자신감이 없다면 어떻게 저 스스로를 모델로 쓰겠습니까?”장씨는 가발업을 처음 시작한 30년 전부터 간판에 자신의 사진을 넣었다. 명함에도 넣었고, 자동차에 사진을 붙여 광고하는 방식은 자신이 원조라고 주장한다. 사업을 시작할 당시 고객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자신을 내세웠던 장씨는 이제 ‘명장’의 자부심으로 스스로를 광고하고 있다. “탈모 사장이 직접 가발을 착용한 사진을 보면 처음 오시는 고객들도 친근해 하고 믿음을 갖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모델료가 따로 들어가지 않아서 좋네요”장씨는 학위복에 학사모까지 쓴 박사 연출 사진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달인이나 명장과 같이 수십 년 쌓아 온 노하우를 없지만 채소가게 청년들은 자신들의 사진을 당당하게 내걸었다. 정훈기(32)씨와 허태영(32)씨는 3년 전 채소가게를 함께 열었다. 간판에 두 사람의 사진을 걸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개업 직전. 투자비를 아끼기 위해 간판 대신 내 건 현수막 속에서 두 친구는 하트를 만들며 환히 웃고 있다.
두 청년 사장님 사진에 대한 반응은 동네 아이들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훈기야 놀자, 태영아 놀자”고 떠들며 가게 앞을 지나는 꼬마들이 점점 늘더니 어느새 성대 시장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가 됐다. 유동인구가 많은 삼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데다 특이한 상호와 사진 덕분에 손님은 점점 늘어났다. ‘박리다매(薄利多賣)’가 경영의 원칙이자 성공비결이다 보니 싸고 좋은 물건을 많이 팔기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몸으로 때우는 게 일상이다. “저희 얼굴 사진 덕분에 손님들이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매출도 올랐다고 믿고 있어요”훈기와 태영씨의 성공사례를 지켜본 다른 친구들도 얼마 전 얼굴사진을 담은 간판을 앞세우고 채소장사를 시작했다.
사업주의 얼굴사진을 간판에 내 건 점포는 특별한 뭔가를 지닌 경우가 많다. 원조나 달인, 명장 등 수십 년간 갈고 닦은 그 곳만의 노하우를 갖췄다거나 고객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간판 속 사진으로 다짐하기도 한다. 고객 입장에선 ‘설마 얼굴 내걸고 속임수를 쓰겠나’ 하는 믿음을 가질 가능성도 크다. 이경희 한국창업전략연구소장은 “최근 살아남는 창업점포는 크게 원조, 기업형, 프랜차이즈 가맹점, 오리지널 점포 등 네 가지로 나누는데 간판에 사진을 내 건 경우는 창업주의 역량을 바탕으로 한 오리지널 점포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아무리 작은 동네 점포라도 자부심이나 자신감이 없으면 얼굴을 내걸고 장사하기 힘든 법”이라며 “간판에 얼굴을 담는 것 자체가 고객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은 물론 점포의 인지도를 한 번 더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고 진단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이명현 인턴기자(숙명여대 미디어학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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