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게오르그 지멜은 ‘2자관계’와 ‘3자관계’를 선구적으로 분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멜에 따르면, 2자관계는 양자 간의 직접적 상호작용에 입각한 특수한 관계다. 하지만 3자관계는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사회학적 관계다. 양자 사이의 제3자는 중재 역할을 맡을 수도 있고, 갈등 속에 어부지리를 취할 수도 있으며, 갈등을 야기해 지배적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 3자관계는 다자관계의 출발점이 되는 사회학적 드라마의 기본 형태다.
최근 논란인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여 문제를 보고 지멜의 논리가 떠올랐다. 두 사안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놓인 우리나라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어떤 외교적 이슈든 그것이 놓인 역사·사회적 맥락과 배경을 주목해야 한다. 사드 배치와 AIIB 참여의 맥락 및 배경에는 미국이 주도한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중국의 굴기로 인한 ‘G2 시대’로의 변동이라는 지구적 헤게모니의 이행이 놓여 있다.
G2 시대가 전쟁이라는 극단적 결과로 귀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실리콘밸리를 앞세운 미국과 인구 13억이 넘는 방대한 내수시장을 보유한 중국 간의 중단 없는 경쟁은, 세계 사회는 물론 전후 70년 동북아의 구조적 강제를 이뤄온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를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게 분명하다. 새로운 세계질서로 가는 이행의 시대에 미국과 중국의 ‘공존 속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것이다.
사드 배치가 이런 공존 속 경쟁의 군사적 측면을 드러낸다면, AIIB 참여는 그 경제적 측면을 보여준다. 사드 배치에 대해선 미국과 중국의 공식적 주장이 엇갈린다. 미국은 북핵 방어를 위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반면, 중국은 중국 본토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 군사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한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두 주장은 모두 맞다. 사드 배치는 북한 핵·미사일을 억지할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는 동시에 중국의 팽창에 맞서는 방어적 포위 전략의 성격을 갖는다.
중국판 세계은행인 AIIB도 이와 유사하다. 미국은 AIIB를 통해 새로운 경제 질서를 구축하려는 중국을 견제할 수밖에 없는 반면, 중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대체할 ‘팍스 시니카’의 국제 금융질서를 꿈꾸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영토와 인구, 자원 규모를 고려할 때 두 국가 간의 ‘경쟁 속 공존’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점이다.
문제는 우리의 선 자리다. 최근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대중 무역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져온 반면, 정치·군사적으로는 한미동맹이 여전히 결정적인 상황 아래 놓여 있다. 한미동맹의 틀을 지속시켜 갈 것인지, 새로운 균형외교로 나가야 할 것인지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네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이념·정파의 관점이 아니라 이익·실용의 관점이 요구된다. 지구적 차원에서 미국과 중국 모두 절대선이 아니다. 정부는 철저히 국익의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둘째, 남북관계 개선이 역시 중요하다.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수록 우리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강압 대 포용의 이분법을 넘어선 남북관계의 진전을 모색해야 한다. 셋째, 공론장을 포함한 시민사회도 대외 이슈 논쟁에서 자기제한적 이성을 발휘해야 한다. 국제질서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 이른바 ‘남남갈등’이 외려 이용되는 상황을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넷째, 사안에 따른 맞춤형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드 배치에 대해선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되, AIIB 참여에 대해선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지멜로 돌아가면, 3자관계에서 힘 센 양자 사이에 놓인 약자가 우리 사회의 실체다. 현재 양자 간의 치열한 경쟁은 우리 활동 공간을 좁힐 수도, 넓혀줄 수도 있다. 약자의 최대 무기는 지혜다. 그 지혜를 모으기 위한 이념적·정치적 휴전을 요청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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