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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민망함을 견디는 어떤 방법

입력
2015.03.1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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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함에 단련된 이들은 강하다. 민망함을 견디는 일은 대체로 이익과 관련이 있는데, 자신의 민망한 선택에 머뭇거림이 덜하고, 외부의 민망한 자극에도 좀처럼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망함의 내성이 단숨의 의지로 생기는 게 아니라 세월의 더께처럼 조금씩 단련된다는 점이다. 드물게 타고난 듯 보이는 이들도 있지만, 다수에게 그 ‘덕목’은 늦게 획득되고, 그 때면 이미 챙길 만한 이익도 살 날도 얼마 안 남아있기 십상이다. 늦게 깨달은 이들이 주는 삶의 지혜라는 것들 중 상당수는 거기서 비롯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직장 초년시절 일이다, 한 상가에서 거나하게 취한 간부가 낯뜨거운 자기 타령을 장황하게 늘어놓던 참이었다. 고개 장단도 모자라 추임새까지 얹어대던 이들의 표정과 그들을 경멸하듯 바라보던 ‘일부’의 표정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지금도 기억한다. 그 날 자리는 두 무리의 작은 활극으로 끝이 났고, 다음날 상사에게 불려간 ‘일부’는 조직 생활 하려면 알아야 하는 ‘분위기’라는 게 있다는 요지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날의 ‘일부’는 그놈의 분위기라는 걸 위해 수긍하는 척했다.

분위기라는 게 그렇게 재생산된다는 걸 안 건, 아니 보게 된 건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세월과 함께 ‘좋은 게 좋은 것’이란 걸 정말 수긍해버린 듯한 ‘일부’의 어떤 표정, 또 나의 겉과 속에서. 저 기억들이 조롱처럼 떠올라 민망해지면, 붉어진 낯을 식히는 주문처럼 자기 최면을 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낯 뜨거운 자극들로부터 거리 두기, 혹은 돌아 앉기는 민망함을 견디는 한 방법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가령 온갖 추접스러운 행적들을 자기는 납득할까 싶은 변명과 송구하다는 말 한 마디로 돌파하는 인사청문회장 고위공직자 후보들의 두터운 얼굴, 새 학기 대학가에서 들려오는 한심하고 민망한 소식들,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부채춤과 석고대죄, 출퇴근길 지하철과 버스 식당 엘리베이터 안에서 보게 되는 이런 저런 거슬리는 풍경들…. 거리를 둘 수도, 돌아 앉을 수도 없는 결계(結界) 바깥의 세상. 영화 바깥의 영화 같은 세상. 홍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고순(고현정 분)이 “나는 세상에서 민망한 게 제일 싫어”라는 짜증의 박력으로 자신을 민망하게 한 상대와 영화 바깥의 관객까지 민망함으로 보복하는 것도, 어쩌면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다. 민망함의 고통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주문으로 충분히 타락하지 못한 이들과 고순의 박력을 지니지 못한 이들의 숙명인지 모른다.

민망함을 견디는 또 한 방법은 조금 더 깊이 타락하는 것이다. 자극을 반영하는 내면의 거울을 적당히 더럽게 방치하는 일.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유권자라는 아이덴티티, 부채춤의 그들과 같은 민족이라는 아이덴티티, 웬만큼 배웠다는 알량한 아이텐티티를, 꼭 필요할 때가 아닌 한 치워두는 일. 그럼으로써 영화를 즐기듯 즐기며 사는 것이다.

충북대 문광훈 교수는 가면들의 병기창에서 발터 벤야민이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어떤 작품에 대해 쓴 글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그(레스코프)는 세상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않고도 이 세상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모범상을 본다.” 문 교수는 이렇게 덧붙인다. “아마도 행복한 사람의 삶이란(…) 자연스럽게 자기 일을 하는 것, 세상과 거리를 두지만 그렇다고 사회와 격리되지는 않는 것, 그래서 일정한 거리감 아래 자기 일에 골몰하고, 이렇게 골몰한 일이 ‘정당하게’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을 문 교수는 ‘염세적 개입’이라 부른다. “절망이 반복되고 환멸은 쌓여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제 필요한 것은 희망의 돌봄이 아니라 환멸의 관리일 것이다. 그것은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염세적 개입이다.” 그 역시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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