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밝자 "정월 보름" 마을방성 쩌렁… 달집 만들기 '부역' 동원령
휘영청 달이 뜨고 타오르는 달집… 내 손으로 만든 진짜 불꽃놀이
“오늘은 양력 3월5일, 음력으로는 정월 보름입니다...” 마을회관에서 하는 방송이 잠결에 들렸다. 곤한 잠을 깨기는 억울하지만 힘들여 한 쪽 눈을 떠보니 역시나 방안은 아직 컴컴했다. '대보름인건 알겠는데 꼭 꼭두새벽에 방송해야 하나. 난 죽었다 깨도 마을 이장은 못하겠다. 시켜주는 사람 없으니 천만 다행이지.’ 아내한테 뺏긴 이불 끝자락을 끌어당기며 달콤한 꿀잠을 이어가려는데 휴대폰 벨이 울린다. 동갑내기 이장이다. “왜에~!.” 늘어지고 불만 가득한 대답을 했더니 바로 쇳소리다. “야! 빨리 안 나오고 뭐 해. 오늘 달집 부역한다고 했잖어!” “알고 있어!” 퉁명스럽게 대답이 튀어 나왔다. 정월 대보름 행사에 쓰일 달집을 만들기로 한 날이 오늘이다. 귀에서 전화기를 떼어 내 시간을 확인하니 7시 반이었다. “엥?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창문을 다시 보니 가장자리 틈들이 훤했다. 꽉 내려 닫은 블라인드한테 속은 거다. 아들 선재가 고등학생이 돼 기숙사로 직행한 탓에 아침 긴장감은 멀리 시집 보내버리고 알람도 없이 세상 모르고 잔 것이다.
겨울철 피부관리를 핑계로 세수는 생략한 채 서둘러 옷을 챙겨 입다 보니 전날 이장이 말하기를 분명히 8시부터라고 했고 아직 늦은 것도 아닌데 왜 난리를 부리나 싶었다. 그리고 ‘공동작업’이나 ‘울력’ 같은 말 놔두고 왜 어감도 안 좋게 굳이 ‘부역’이라고 하나 의아했다. 마을 일이니 기꺼이 좋은 마음으로 나가건만 괜히 끌려나가는 듯한 느낌도 들고, ‘부역자’ 하면 왠지 색출의 대상이 되는 기분도 드는데 말이다.
회관 앞에 도착하니 벌써 옹기종기 나와 있는 형님들이 여남은 명 되고, 일흔을 넘기신 아버님들도 한 두 분 계셨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 엄숙하기도 하고 진중한 기운이 돌았다. 투박하고 묵직한 조선낫을 한 자루씩 옆에 차고 당산나무 아래 삼삼오오 모여있는 폼이 마치 탐관오리 하나 작살내러 가기 위해 집결하는 동학군 같았다. 나도 덩달아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무거운 표정으로 목례를 했다. 머릿속 대하드라마는 오래 가지 않았다. “아야, 넌 막내가 형님들 다 기다리는데 맨 꼬래비로 나와서 쓰겄냐.” 바로 위 연배인 J형님이 퉁바리 주듯 말하면서도 끝에 입 꼬리가 올라간다. 이 형님은 반갑다는 인사를 매사 이런 식으로 한다. 가끔 전화해서는 다짜고짜 “아야, 넌 내가 전화 안 하면 왜 통 먼저 전화를 않냐. 내가 싫으냐?” 한다. 이거는 술 먹자는 얘기다. 어쨌든 제일 늦었으니 “죄송합니다” 하면 될 것을 나도 이제 마을에서 짬밥 좀 먹었답시고 “뭐 여덟시두 안됐구만” 하면서 살짝 개겼다. 형님이 바로 낫 든 손을 움찔한다. “아야, 여그 형님들 시계는 30분씩 빨리 간다냐? 하루 이틀 부역이여? 뻘 소리하구 있어이, 확!”
하긴 가끔이나마 전화로 확인해주는 것 만도 감지덕지다. 내려와서 느낀 농촌의 움직임은 ‘만사방통’이었다. 모든 일은 방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말이다. 일단 마을 스피커에서 지지직 소리만 나면 몸이 얼었다. “아 아, 회관입니다.” 하는 말이 들리면 화장실에서 물 내리다가도 ‘동작 그만’을 해야 했다. 겨울 눈보라에도 맨발로 툇마루에 나가 기어코 듣고야 말아야 한다. 마을회관 방송은 농촌 행정의 마지막 완성단계이자 농사 정보의 중요한 창구요, 만사를 결정하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농사 관련 모든 업무의 신청 접수 수령을 집행하고, 마을의 경조사와 행사 정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 끝나는 방송은 사실 부탁이나 청유가 아니라 거의 명령에 가깝다. “방송 못 들었댜?” 하는 말은 “이 마을 사람 맞어?” 혹은 “정신이 있는겨?”와 같은 뜻이다.
어쨌든, 이장님이 “내일 마을 청소 부역이 있으니 조반들 드시고 회관으로 모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표준말 가깝게 방송하시면 한참 헷갈렸다. 아침 먹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간혹 아침 안 먹는 사람도 있을 텐데 도대체 언제까지 나오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방송 끝나자 마자 쪼르르 회관으로 달려가서 군기 바짝 든 모습으로 “몇 시에 나오면 될까요” 이장님께 여쭤보면 “그냥 아침 천천히 먹고 나오면 되네” 하신다. “그래도 몇 시쯤...” 하면 “대강 뭐 한 7시쯤 나오면 되지 않을까 싶네만” 하신다. ‘대강’ ‘한’ ‘쯤’ ‘되지 않을까’ 이런 단어로 위장한 ‘7시’는 절대로 정확한 시각이 아니었다. 여쭤 본대로 대강 7시에 나가보면 항상 작업은 절반 이상 진행된 상태였고, 맨날 죄송하고 맨날 머리 조아려야만 했다. 짧은 경험을 종합해본바, “천천히 아침 먹고”는 “날 밝는 대로 바로”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다.
8시 조금 지나자 나온 사람들만이라도 출발하자는 중론에 따라 트럭 서 너 대에 나눠 타고 산으로 향했다. 산 주인의 허락 하에 가지가 많고 적당한 굵기의 소나무를 골라 엔진 톱을 갖다 대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나무를 쓰러뜨리고 가지를 끌어내리고 하다 보니 금새 이마가 젖기 시작했다. 한 두 시간을 가지에 긁히고 가시에 찔리면서 작업을 하다 보니 “새참 묵고 헙시다!” 고함이 나왔다. 잠시 쉬었다가 하기로 하고 모여 앉았다.
알콜성 음료와 안주 같은 간식거리로 허기들을 채웠다. “아니, 맨날 나오는 사람덜만 나오고, 안 나오는 놈들은 코빼기도 한 번 안보여. 이거 너무허는 거 아니여?” 누군가 볼멘소리를 했다. “새로 이사온 그 양반은 첫 날 인사 한번 하고는 당췌 보질 못 허겄네.” 또 누군가 맞장구를 쳤다. 설, 추석, 연말에 마을 대청소가 있고, 대보름이나 마을 공동제사 등 합동 행사가 있어 일년에 대여섯 번은 부역을 하게 된다. 어쩌다 한번 빠지는 사람은 이유도 확실하게 얘기하건만, 거의 안 나오는 사람들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딱히 이유가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마을에 회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회칙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긴 하다. 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무슨 죄냐”고 하기도 한다. 허나 농촌에선 가만히만 있는 게 죄는 아니지만 경우에 어긋난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내년부터 면 단위로 대보름행사 한다는 말도 있드만. 그라믄 우리 마을도 인자 대표만 딱 내보내 불자고. 왜 우리만 요로코롬 나와서 쌩고생이당가.” 젊은이였던 사람들은 점차 노인으로 자리를 옮기고, 새로 들어온 외지인들은 행사 참여율이 저조하다 보니 그런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마을 들어올 때만 볼그레 헌 얼굴로 인사하면 뭐 한댜? 딱 그걸로 끝인디. 말도 안 되는 값에 집 사고 땅 사고 들어와 땅값만 올려 놓고, 그 덕에 살던 사람들은 논 한마지기 사기도 힘들어졌구마. 그 사람덜 내려와 도움되는 게 뭐 있댜. 안 그려?” 목청을 높이던 J형님의 눈이 나와 딱 마주쳤다. 또 움찔하더니 씨익 웃는다. “너는 빼고”
소나무 몇 그루로 1톤 트럭 넉 대를 채우고는 달집을 세울 공터로 내려왔다. 아버님 몇 분이 일찌감치 공터에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작년까지만 해도 같이 나무를 하시던 분들이지만 다리 수술, 디스크 치료 등으로 더 이상 힘든 일은 어렵다. 훈수라도 거들 겸 나오신 거다. “밑둥에 볏단이랑 솔가지를 더 채워야 허는데... 아직 경험들이 없응게 잘 모르는구먼.” 일 하는 게 맘에 안 드시나 보다. ‘경험이 없다’고 탓하는 작업반장도 올해 일흔 셋 이니, 어르신들 말씀대로라면 이런 행사를 이끌기 위해서는 건장(?)한 80대 초반의 장정들이 필요한가 보다. 그닥 현실성 있는 훈수는 아니다.
달집을 세운 뒤 달이 뜰 때까지 비는 시간은 대개 술로 채운다. 쌀쌀한 날씨에 야전에서 먹는 돼지김치찌개와 소주 막걸리는 목으로 넘어가면서 보약이 되는 느낌이다. 오전부터 비틀거리는 형님도 있고, 아직 붉게 타는 태양 아래 묘지에 누워 주무시는 분도 있다. 희한하다. 도시에서 가끔 보는 불편한 모습이 촌에서는 편안함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멀리 구름 속으로 달이 솟고 드디어 달집이 타올랐다. 나라에서 허락한 기가 막힌 불놀이다. 돈만 주면 하늘에 네온사인처럼 그려주는 강 건너 불꽃놀이가 아니다. 덩어리 된 불이 저 혼자 출렁거리고 몸뚱아리까지 후끈거리게 하는, 손수 마련한 진짜 불꽃놀이다. 동시에 구례 들판 여기 저기서 연기가 솟았다. 꽹가리와 징이 불길을 살리고 장구와 북 장단이 사람 맘을 흔든다. 이장은 돼지머리 구멍마다 가득한 봉투를 정리하기 바빴고, 어머니들은 뜨겁고 하얀 달집을 향해 연신 손바닥을 비볐다. 묘하게 흥분됐다. 소설 ‘토지’의 중간쯤에 나오는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보는 기분이다. 한편으론 불안했다. ‘언제까지 이런 장관을 눈으로 볼 수 있을까’ ‘곧 나이 들어 남들이 마련한 잔치에서 구경만 하게 되는 게 아닐까.’
오봉댁 어머니께 여쭤봤다. “어머니, 아까 달집에 대고 뭐 비셨어요?”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신다. “새끼덜 살펴달라고 빌었지 뭐 딴게 있당가요. 그저 몸 상하지 말고, 아프지 말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어머니가 한 말씀 덧붙이셨다. “내 몸뚱아리 잘 봐 달라고 빈 적은 없응게요.” 이상했다. ‘소원 목록에 하나만 더 추가하면 되는데 왜 빌지 않으셨을까.’ 아마도 그러셨을 거다. 신령님이 소원을 들어줄 때 내 소원 들어주느라 혹 자식 몫을 뺏을까 봐. 거의 매일 병원 가서 물리치료 받는 분이 오로지 자식들만 건강하면 좋겠다고 하신다.
대보름 날 거하게 시작한 술자리가 저녁마다 며칠 째 이어졌다. 마음은 몰라도 몸은 지쳐갔다. 엊그제는 땔감을 옮겨주느라 고생한 D동생이랑 묵은 양주마저 꺼내 먹었다. 어제는 정말 쉬고 싶었는데 또 다른 동생이 저녁을 먹자고 연락이 왔다. 속상하다는 사연을 들어줘야 할 것 같아 김치찌개에 또 반주를 몇 잔 했다. 자리를 파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려 들어보니 아버지시다. “별 일 없냐. 아픈데도 없고? 술 조심하고...” 내가 먼저 전화 드려 여쭤야 할 내용인데 늘 이런 식이다. 나는 정말 쓸모 있는 자식인 걸까. 자신이 없다.
아버지 걱정대로 몸에 무리가 왔다. 3년 전에 왔던 통풍이 도져버렸다. 큰일이다. 이제 봄도 왔고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인데. 아내는 입김 불어넣은 고무장갑처럼 퉁퉁 부은 발에다 연신 뜸을 떠 주고 차를 끓여다 먹였다. 덕분에 일주일은 갈 것 같은 통증이 하루 만에 고개를 넘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읍내에서 식당을 하는 동생이 전화를 했다. “형님, 그거이 엄청 아프담서요.” “안 아파 본 사람은 몰라. 정말 입김만 닿아두 아파. 그나 저나 얼른 나아야 한 잔 할 텐데” 동생이 웃더니 한마디 했다. “형님, 아직 덜 아프시구만요.”
그러게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덜 아픈 게 아니라 철이 덜 든 것 같기도 하다. 이러고도 인생 반 백년인 내년에 하늘의 명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나이가 드는 건지 처먹는 건지 모르겠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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