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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꽃샘추위

입력
2015.03.1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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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들어간 낱말은 거의 다 예쁘다. ‘꽃등’ ‘꽃물’ ‘꽃신’ 등 꽃과 짝을 이뤄 만들어진 말들은 듣는 순간 절로 웃음이 번진다.(그러나 ‘꽃물’의 사전적 의미는 ‘일의 긴한 고빗사위’를 뜻한다. 그래도 ‘꽃물 들다’라는 말로 쓰일 땐 시적으로 아름답다) 그런 말 가운데 조금은 덜 반갑고 더 살가운 느낌이 드는 게 있으니 바로 ‘꽃샘추위’일 것이다. 봄의 길목을 넘어서는데 때 아니게 심통을 부리는 추위는 봄 옷의 가벼움과 봄의 설렘을 배반하는 까닭에 체감되는 온도는 더 맵다. 하지만 그 말조차 귀엽다. 예쁜 꽃을 샘내는 추위가 앙증맞다.

지난 한 주 꽃샘추위가 매서웠다. 늘 그렇듯 거센 바람은 봄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움츠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입춘 경칩 지나 봄이 열리는 줄 알고 개구리는 땅 밖으로 나왔고 꽃눈은 겨우내 버틴 인내의 승전보를 보내려는데 난데없이 매운바람이 부니 움찔할 수밖에 없고 그런 추위가 얄밉다. 하지만 그렇게 꽃을 괴롭히는 추위조차 ‘꽃’이라는 말과 만나니 살갑다.

꽃샘추위가 야속하고 밉지만은 않은 까닭은 겨울과의 작별에 대한 예의를 상기시켜주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 심술의 길이가 길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길고 매웠던 겨울이지만 그래도 버텨낸 자신과 자연이 대견하고, 별로 따뜻한 환영 받지 못한 추위도 떠나는 길에는 너그럽게 작별인사쯤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돌아보게 하는 게 바로 꽃샘추위다. 달력으로는 1월이 새해지만, 생리적 몸은 봄이 새해로 느껴진다. 그 봄의 애틋함을 더 강하게 해주는 것이 또한 이 꽃샘추위니 그것을 어찌 야속하다 타박할 수 있을까. 물론 여름도 인디언 서머가 있어서 모진 계절의 끝물을 끝내 각인시키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건 덤인 듯 느끼는 반면 꽃샘추위는 그 강렬함과 어김없음 때문에 그 존재감이 또렷하다.

하나의 계절을 건너는데 구렁이 담 넘듯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또렷하게 그 경계를 확인시켜주고 새로 맞는 봄을 더 따사롭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꽃샘추위는 그래서 고맙기까지 하다. 매운바람이 어느새 거짓말처럼 바람 끝이 순해졌다. 대나무가 매듭이 있어서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처럼 꽃샘추위는 가장 또렷한 계절의 매듭처럼 보인다. 강렬하지만 길지 않은, 게다가 ‘꽃’과 어우러져 이름도 예쁜, 그러나 성격은 칼칼한 악동 같은 꽃샘추위가 물러가니 곧 완연히 봄이 될 것이다.

세상이 맵고 시리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춥고 서럽다. 그렇다고 봄의 희망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미래의 비전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그 로드맵 따라 또박또박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지금 우리 세상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모진 겨울 어렵게 건너왔는데 더 험한 겨울로 연장한다. 그러면서 봄이 저 골목길 끝에 들어서고 있다고 헛된 구호만 외친다. 모범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악취와 탐욕의 민 낯을 뻔뻔히 드러내며 히죽 웃는 자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 농간이나 부린다. 겨울왕국에서 꽃샘추위는 사치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도덕과 인성은 진작에 찜 쪄 먹은 자들이 자신들은 펄펄 끓는 실내에서 반팔 입고 활보하며 수많은 사람들 추위에 내몰려도 나 몰라라 하며 그런 겨울이 천년만년 무궁진세 할 듯 여길지 모르지만 이미 언덕길 눈 녹은 틈새에 복수초 피었고 남쪽에서는 고고한 매화향이 자리를 깔기 시작했다. 자연은 인간의 탐욕보다 훨씬 우월하다. 기어코 봄이 오는 것을 꽃샘추위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아무리 봄 길 막고 싸늘한 냉기로 가두려 해도 이미 튼 꽃눈을 도려낼 수는 없다. 아직 겨울왕국은 절반도 넘지 않았으니 꽃은커녕 봄의 문턱조차 아득한 듯 보이지만 기껏해야 꽃샘추위일 뿐이다. 자연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질서는 기어코 봄을 제 시간에 들여놓는다. 봄을 포기하면 그게 겨울이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꽃샘추위쯤은 거뜬하게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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