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의 머리말에서 빅토르 위고는 “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라며(민음사 번역본) 책 출간의 의미를 설명했다.
근대적 시민법 질서가 형성되던 19세기 프랑스에서 빅토르 위고는 교화를 위해 부과되는 형벌이 인간의 삶과 운명을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는 현실에 직면했다.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장발장의 삶이 그러했다. 소설 속에서 그는 미리엘 주교를 만나는 행운을 통해 본래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지난달 25일 출범한 장발장은행의 문제의식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률에 근거해 합법적으로 부과된 형벌이 인간의 삶과 운명을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을 작은 행운을 통해서라도 막자는 결심이 그것이다. 시민들의 소박한 마음을 모아 19세기의 프랑스에서 장발장이 만났던 그 행운을 21세기의 한국에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장발장 은행은 가난 때문에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가야 하는 이들에게 이자 없이 벌금을 대출해 주는 곳이다. 돈을 빌린 사람은 그 돈으로 벌금을 낸 후 6개월의 거치 기간을 갖고 1년 동안 상환하면 된다. 장발장 은행에 대출을 신청하는 사람들은 벌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벌금을 낼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 대출을 통해 그들은 가난 때문에 교도소에 가는 대신 자신의 일자리를 유지하고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
장발장은행은 시민들의 모금으로 돈을 모으고, 돈이 모이는 대로 대출하며 상환 받은 돈으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은행이라는 이름을 쓰지만, 이윤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다행히 보름 만에 약 5,000만원이 모금되는 등 많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장발장은행의 대출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장발장은행은 우리나라 벌금제 개혁 캠페인 ‘43,199’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43,199’란 2009년 한 해 동안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 노역장에 유치된 사람들의 숫자다. 이 캠페인은 일수(日數)벌금제를 도입하고 벌금형에 집행유예를 가능하게 하는 등 벌금 제도의 개혁을 목표로 삼았다.
일수벌금제는 개별 범죄의 벌금 액수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수입에 비례하여 책정하는 제도를 뜻한다. 벌금형에 대해 집행유예를 허용하자는 논의는 벌금을 마련할 시간을 주어 가난 때문에 벌금을 납부하지 못해 교도소에 유치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같은 취지에서 현재 소극적으로 운영되는 검찰의 벌금 분납 제도를 더욱 활성화하고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캠페인 ‘43,199’는 벌금제 개혁 입법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아직껏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장발장은행은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가난한 이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법률이 형벌의 형평을 꾀하지 않고 가난한 이의 선의를 믿지 않을 때, 잠시 동안이나마 장발장은행이 그 대안으로 역할 하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장발장은행이 줄 수 있는 도움은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만난 것처럼 행운에 불과하다. 불행하게도 현실에서 그런 행운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하루빨리 법률의 제ㆍ개정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이 형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지 않고, 가난한 이들이 행운에 의존하지 않아도 법률과 법원, 검찰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벌금을 내고 떳떳하게 생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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